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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신애 Jun 08. 2021

카이스트의 시대가 오고 있다1

왜 그들은 대학에 기부했을까

왜 그들은 대학에 기부를 했을까

90년대가 끝날 즈음에 나는 대학에서 모금 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90년대 학번이었고, 새파란 20대 초반 '여직원(그때 대학에는 '직원'과 '여직원'이 있었다. 타이핑이나 업무 보조를 하는 일이 여직원에게 주어졌었다. 내가 조금 다른 것이 있었다면 공채로 입사를 한 것과 '미쓰황'이 아닌 '황선생'으로 불렸다는 것이다.)이 독립적으로 '발전기금 모금'과 '동문 관리'업무를 맡게 된 배경은, 우선 그 일이 한직이었고, 내가 여성 동문이라 나이 든 남자 선배님들께 쉽게 다가갈 수 있을거라는 기대감이 컸던 것 같다. 어쨌든 그 기대는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 내 성향이 저지르고 보는 편이라서 좌충우돌 했는데, 아예 안 한 것보다는 결과가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을테니 말이다.


그렇게 '어쩌다' 시작한 모금을 지금까지 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지점이 바로 대학 모금에 관한 것이다. 나의 첫 15년은 대학과 병원에서의 모금이고, 그 이후 7년은 국제개발구호과 자선, 사회복지, 시민활동, 문화예술을 총망라해서 접근하고 있으니 대학은 내 첫 정이자 친정이며 늘 돌아가고 싶은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대학의 모금은 실로 임팩트가 있었다. 느리게 움직이지만 규모도 크고 획기적인 명분을 가진 기부가 이루어진다.  소소한 기쁨은 적지만 마음을 짜릿하게 하는 감동이 드물게 찾아온다. 그런데, 다양한 다른 영역의 모금 경험을 해보니 기부가 다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어떤 기부는 '누군가의 핍절한 현재의 삶을 살리는' 자선이 되고, 어떤 기부는 '미래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당장 죽어가는 이를 살리는 일은 이유를 따지지 말고 해야 할 일이고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가져야 하는 긍휼'의 마음이다. 그런데, 미래를 위한 기부는 '투자자'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하기 어렵다. 당장 하지 않는다고 해서 큰 일 나지도 않고, 지금 기부를 해도 당장의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로운 리더와 투자자는 거시적 관점에서 크게 내다 보고 투자를 한다. 지금의 작은 투자가 미래의 패권을 달리 할 것을 아는 사람만이 하는 결정이다. 대학들은 모금을 위해서 전략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대학은 모금에 신경을 안 쓴다. 모금이 중요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실제로 아무런 투자를 하지 않는다. 감나무 밑에 앉아 감이 내 입으로 떨어지기를 바라는 속내다. 대학은 모금이 잘 될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금을 가장 못하는 영역이 되어버렸다. 그 가장 고유하고 차별적인 강점을 보유하고 있던 고액모금과 유산기부의 가능성마저도 일반 NGO에게 하나 둘씩 내어주고 있다.


대학은 보이지 않은 그물망 같은 곳이다. 수많은 걸출한 인재들이 길러지고 끊임없이 발전적 교류가 일어나는 곳이다.(만약 내게 노후에 봉사할 곳이 주어진다면 나는 대학이기를 바란다. 그 곳에서는 젊음과 청춘이, 객기와 도전이, 꿈과 혁신이, 품격과 자유가 뒤엉킨다.) 청소년 시절에 '내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한 내가, 약간의 방향을 정리하고 다시 정신을 차리면서 내게 허락되지 않은 외부세계를 향해 한 걸음 내디딜 수 있었던 곳도 바로 대학이었다. 대학은 그렇게 미래 세대에게 '변화와 기회, 도전의 장'이 되어 준다.


졸업 후 모교에서 일하게 된 나는 동문 직원으로서 훌륭한 나눔의 모델들을 '존경 어린'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내가 나이 50이 되면 저렇게 멋진 기여를 할 수 있을지 늘 궁금했다. 나이가 든다고, 사업에 성공을 하고, 관직에서 출세를 했다고 해서 누구나 다 멋진 기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픔을 느끼는 ‘프래더윌리증후군’(Prader-Willi Syndrome)에 걸린 것 처럼 돈이 아무리 많이 모여도 타인을 위해 기여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런데, 정말 특별한 사연도 아닌 그저그런 이유로 큰 돈을 쾌척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때 나의 나이로는 다 이해할 수 없는 맥락들이 있었다. '모교가 고마워서',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이 감사해서', '후배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기를 바래서', '우리나라의 미래가 대학의 손에 달려 있으니'라는 식의 이유가 기부동기로 언급되었는데, 나는 그 의미를 고귀한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매우 형식적인 멘트로 들렸고, 마음 깊이 공감하는 참 뜻을 감히 알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이제 나이 오십을 바라보고, 지난 해부터 카이스트의 모금이 심상치 않게 흔들흔들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새로운 설레임에 빠진다. 곧 우리나라 역사를 새로 쓸 획기적인 사건들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이것은 모금을 오래 한 사람으로써 느끼는'어떤' 촉이다. 대학에서 제 기능을 해야 기업이 필요로 하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가 성장하고 다음 세대를 책임져 갈 수 있다는 것을 기업인들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왕이면 모든 대학의 졸업생들이 이런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는데, 이번에는 카이스트 졸업생들이 그 주도권을 쥔 것 같다.  


대학의 기부금은 없어도 그만인 것이 결코 아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퇴보할 수 밖에 없는 자명한 진리 앞에서 대학이 퇴보하지 않고, 성장할 수 있기 위한 최소한의 자양분이다. 대학을 쫄쫄 굶기면 미래의 주역이 될 우리 자녀들의 뇌와 사회적 역량이 쪼그라들게 된다. 우리 아이들이 기성세대가 되어 있을 즈음에 우리는 노인네가 되어서 자녀들의 정책과 활동에 기대사는 신세가 될 것인데, 그때 그들이 지혜롭지 못하고 나라를 견실하게 이끌 준비가 안되어 있다면 그 후폭풍은 우리 세대의 노년을 불행하게 집어삼킬 테니까 말이다. 카이스트의 졸업생들이 학교의 발전을 지지한다는 것은 카이스트의 향후 10년, 50년, 100년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말과 같다. 교육이 백년지대계가 되어야 하는 이유, 세대와 세대가 교차해서 지식과 삶의 방식을 전수하고 새로운 시대의 싹을 티우는 곳이 대학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계속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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