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라면 그런 일은 없겠지만, 해외생활을 시작했던 초창기엔 제법 자주 주변 지인이나 직장 동료들의 생일에 식사를 대접하곤 했다. 사실 영국에서는 특별히 집에 게스트를 초대해서 식사를 준비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누군가의 생일이라고 개인이 대신 밥값을 내주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생일파티 게스트들이 돈을 모아 생일 주인공의 식사를 다 같이 나눠서 계산하는 경우는 꽤 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후배나 주변 사람들의 밥을 사는 한국적인 문화(“내가 살게!”)가 몸에 깊이 배어 있었던 터라, 종종 지인들의 생일날 생일 주인공의 식사를 내가 계산을 하면 너무 고마워했고, 그중엔 다음엔 꼭 자신이 사겠다며 답례를 하기도 했다.
그 시절, 내가 다니던 회사에 나름 친하게 지내던 동료가 있었다. 입사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신입사원이었는데, 성격이 살가운듯해 가끔 점심도 같이 먹으며 친해졌다. 물론 생일쯤이면 회사 동료들이 작은 케이크나 꽃 같은 선물을 준비해 오후에 다 함께 모여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긴 하지만, 아직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던 그녀는 점심에 따로 단체 식사를 계획하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그래서 같이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고 생일 주인공인 그녀의 점심값도 생일선물 겸 내가 계산을 했다. 그녀는 너무 고마워하며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영국에선 그렇게 개인이 밥을 ‘턱’ 하고 사주는 일이 흔하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흘렀고, 이제 그녀도 점점 더 많은 동료들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새로 들어온 직원들에게 먼저 잘해주려고 하는 편이지만, 반대로 처음엔 지켜보다가 점점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다. 돌이켜 보면, 그런 방식이 오히려 더 현명한 자기 방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잘 알지도 못한 미지의 누군가에게 멋모르고 다가가다 보면, 때론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겪게 되기도 하니까.
그해도 그녀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평소처럼 종종 점심을 함께하던 사이여서 생일도 축하할 겸 나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작년처럼 생일 점심으로 내가 밥을 사기로 했는데, 이번엔 그 호의가… 약간은 독이 된 걸까.
생일 전날, 그녀에게서 갑작스럽게 메시지가 왔다.
“점심 약속을 다음 날로 미뤄도 될까?”
나는 회사 미팅이나 급한 일정이 생긴 줄 알고, “물론이지!”라고 흔쾌히 답했다. 그리고 다시 내 일로 돌아갔다.
그런데 다음 날, 그녀의 생일 점심시간. 몇몇 동료들이 그녀의 생일점심 같이 먹으러 갈 거냐고 내게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나와의 점심을 다음날로 미룬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전날 그녀와 몇몇 동료들이 함께 생일 점심을 하자고 물어봤고, 혹시 내가 사줄 ‘생일밥’이 무산될까 봐. 즉, 공짜 밥이 날아갈까 봐. 내게는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점심 약속을 미룬 것이었다.
다 같이 모여 생일 점심을 해도 될 것을. 공짜 밥이 아까워서 따로 챙기려 했다는 사실에, 묘하게 씁쓸해졌다.
그리고 더 나아가, 왜 이곳 사람들은 당연하게 더치페이를 하는지, 왜 그런 방식이 하나의 문화가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오히려 서로에게 깔끔하고 편한 관계. 그게 이 문화의 장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나는 정말 좋은 친구나 지인이 생기면 집에 식사 초대를 해서 준비한 식사를 대접하곤 한다. 손이 가고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같이 준비한식사를 함께 하고 와인 한잔씩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 참 좋다.
언제 어디서든 사람과의 관계는 문화나 관습을 떠나 결국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다름에서 서운함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 다름을 이해하고 나누는 과정 속에서 더 깊고 진솔한 관계가 자라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누군가와의 한 끼 식사가 더 없이 귀하고 감사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