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댕기

엄마와의 열여섯 번째 이야기

by 스카치

https://youtu.be/kp1m3RIY47E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엄마가 뒤를 돌아보셨다. “내 댕기!” 머리카락을 가두고 있던 고무끈이 바닥에 떨어진 모양이다. 댕기? 고운 표현이긴 하지만 좀 의아했다. 이전에 엄마가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엄마 나이 열일곱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쓰셨던 단어인 듯싶다.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언제나 재미있다. 삼일절이나 6.25 특집극에 나올 법한, 배경이 등장하는데, 어떤 것은 겁나 드라마틱해서 한 편의 영웅 활극을 보는 듯했다. 가끔은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나의 외할머니도 출연하셨다.


북한군과 한국군 양쪽의 표적이 되었던, 외가 쪽 친척이 있었다고 한다. 그 집은 임신한 며느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임을 당했다. 어느 날 외할머니는 문제의 생존자를 피신시키기 위해 살상과 총질이 난무하는 밤차를 타셨는데, 그때 따라나선 이가, 우주 최강 귀요미 우리 엄마였다. (물론 우리 엄마는 외할머니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아주 큰 짐이 되었을 것이다. 홍콩 사건만 봐도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아무튼 그리 가깝지도 않은 친척 일에 목숨을 건 여행을 떠난 외할머니나 그런 외할머니를 혼자 보낼 수 없다며 몰래 따라붙은 우리 엄마나, 배포 하나는 높이 살 만하다. 시대를 잘못 만난, 이 그릇 큰 모녀가 당시 부잣집에 태어나 공부를 많이 했다면 그 기질상, 독립운동을 하셨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나랑 엄마는 끝내 만나지 못했을 지도.



엄마는 외할머니와 무척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돌아가실 때 외할머니는 삼촌(엄마의 오빠)들을 모아놓고 화순이(집에서 부르던 엄마 이름)에게 잘하라고 하셨다니 그 우애를 짐작할 만하다. 엄마 위로 언니도 있었고 밑으로 남동생이 있음에도 외할머니는 엄마를 유독 아끼셨나 보다.


나는 유언을 좋아하지 않고 앞으로 유언 같은 것을 할 생각도 없다. 살면서 본의 아니게 잔소리를 하게 되는데, 죽어가면서까지 누군가에게 (비록 덕담일지라도) 부담을 주기 싫어서다. 옛날 중국 영화를 보면 자식에게 자신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말을 남기며 눈을 감는 부모가 나온다. (이 사람 진짜 부모 맞아?) 죽음을 앞두고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니고서야 자식한테 그렇게 큰 숙제를 주다니!


이렇듯 반감을 가지고 있음에도 외할머니의 유언은 마음에 든다. 일단 그 내용이 허무맹랑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짧아서 좋다. 어쩐지 외할머니는 우리 엄마처럼 아주 귀여운 분이셨던 것 같다.


외할머니 얘기를 할 때 엄마는 신나 보인다. 내가 남들한테 엄마 얘기를 할 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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