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vKTBDPJErcs
뇌출혈 이후, 많은 것이 변했다.
자리에 누운 엄마는 코를 파고 코딱지를 허공에 튕겨냈다. 화장실에서는 비데 물 닦아낸 휴지를 재사용하려 했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의사 표현에 있어서도 단호해졌다. 당최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마음 약했던 우리 엄마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항상 나쁜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원래 세제 사용 후, 반드시 행주질을 했다. 나는 행주가 위생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순순히 엄마의 뜻을 따랐었다. 그러나 엄마가 병원에 계시는 동안, 나는 내 맘대로, 손으로만 문질러 세제를 씻어냈고 곧 그 방식에 익숙해졌다. 퇴원 이후, 식사를 마친 엄마와 눈이 마주쳤을 때, 비로소 엄마의 원칙이 떠올랐으나... 이미 늦었다. 딱히 둘러댈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솔직히 시인하고 투항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엄마가 먼저 나를 외면했다.
나는 지금도 엄마가 지켜보는 가운데 당당하게 내 식으로 설거지를 한다.
엄마가 중시하는 원칙 중, 내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어묵 삶기였다. 유명 상표 어묵도 우리 집에 오면 일단 팔팔~ 끓여졌다. 엄마가 어묵을 더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소독이라고 불렀는데, 소독된 어묵은 이후 어떤 조리를 해도 쫄깃한 식감 따윈 없었다.
그러나 2020년 현재, 우리는 쫄깃쫄깃한 어묵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포장지에서 꺼낸 어묵을 바로 프라이팬에 볶아 낼 수 있다니! 소소한 기쁨이었다.
반면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엄마의 손톱은 여전히 피가 나도록 바짝 잘려야 한다. 화장실 티슈는 세 칸 단위로 분리되어야 한다. 그리고 버려진 휴지는 휴지통에서 1미리라도 삐져나오면 안 된다. 슬리퍼는 가지런히 놓여 있어야 했고, 만약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어떻게든 당신의 손으로 완벽하게 바꾸어 놓았다. 그 바람에 사고도 잦았다.
오늘 아침에도 엄마의 캐릭을 확인할 수 있었다. 코를 훌쩍이는 엄마에게 급히 티슈를 건넸다. 금방이라도 콧물이 떨어질 듯한데도 엄마는 여유 있게 티슈를 접기 시작했다. 가로로 한 번 세로로 한 번. 나는 다급하게 “콧물!”하고 외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엄마는 화장지 네 개의 각이 완벽하게 90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콧물을 닦았다. 극적인 타이밍이었다!
그러고 보니 병원에서도 엄마는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중환자실 첫 면회가 허락되었을 때였다. 가족들은 내게 순번을 양보해주었고 나는 엄마가 그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주하기 두려웠다. 생각보다 더 나쁜 상태일까 봐 잔뜩 겁을 먹고 침상에 한 발 한 발 다가가는데... 나를 발견한 엄마는 다짜고짜 짜증을 내셨다. 옆 옆 침대 보호자가 너무 시끄럽다는 것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까칠한 캐릭터 그대로라면 안심해도 좋을 것 같았다.
옛날부터 엄마는 예민하고 심약했지만, 경우에 어긋난 일을 보면 참지 못하셨다. 상대가 지위가 높은 사람이든 부랑자든 가리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중환자실을 나올 때 엄마는 담당 간호사와의 헤어짐을 못내 아쉬워했다고 한다. 정 많은 것도 여전했다. 물론 지금은 그 간호사쌤은 물론 중환자실에서의 모든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신다.
앞서 언급했듯 엄마는 우리 집 역시 전혀 기억을 못 하셨다. 퇴원 이후 첫 마실을 나갔을 때다. 비록 휠체어를 대동해야 했지만 오랜만의 햇빛 나들이라 엄마도 나도 들떠 있었다. 안경, 손가방 그리고 무릎담요를 챙기고 물통에 물을 담았다. 마치 함께 배낭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현관에서 5미터도 못 가, 엄마의 얼굴은 심하게 구겨졌다. 아프기 전 사소한 감정싸움이 있었던 유산균 요구르트 아줌마(요즘은 프레시 매니저라 불린다)와 정통으로 마주친 것이다. 그분에게 휠체어 탄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모양인데, 나로서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세상 사람 중에 유독 아줌마만 기억하다니! 좋은 일은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서 (심지어 가끔은 자식의 존재까지도) 말이다. 역시 분노는 사랑보다 진한 건가? 아니 그보다는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엄마의 감정 피라미드에는 자존심이라는 항목이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 국면은 내가 엄마에게 호되게 혼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어지는 엄마의 심술이 귀여워서 까르르 웃고 말았고 엄마는 그런 막내딸의 반응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본인은 너무나 진지하니까.
한 번은 엄마가 좋아하는 고등어조림을 해놓고 일을 하러 나갔다. 집에 돌아와서 식사 잘하셨는지 묻자 언니가 끼어들었다. “맛이 하나두 없어! ” 이것이 조림을 다 드신 엄마의 반응이었다고 한다. 역시 꼿꼿한 우리 엄마에게 관용 따윈 없었다! 낄낄대느라 정신없던 나는 얼마 후에야 언니를 사납게 노려보고 있는 엄마를 발견했다. 눈에는 원망과 분노가 가득했다. 입술도 바르르~ 떨렸다. 순간 언니가 폭소를 터뜨렸다. 엄마의 입에서 튀어나온 짧은 단어 때문이었다. “간신!”
간신! 이 맥락에 딱 떨어지는 단어는 아닌 것 같지만 엄마의 감정은 충분히 전달되고도 남았다. 비록 딸이지만, 타인의 입을 통해 뒷담화 내용이 알려졌다는 사실이 못 마땅했던 것이다. 비겁한 짓을 한 듯한 기분도 들었을 테고. 정말이지 예나 지금이나 엄마는 신의와 체면이 중요한 사람이다!
영화나 소설 등 픽션에서 캐릭터의 변화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주인공은 수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성장하고 끝날 때쯤엔 보통, 처음과 다른 인격체로 바뀌어있다. 그러나 잘 만들어진 픽션의 주인공은 그 본질의 일부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오래된 진리가 반영된 것이다. 픽션은 현실을 반영하고 그리고 현실의 우리는 입체적인 캐릭터가 나오는 픽션을 명작이라 부르며 공감한다.
엄마의 뇌출혈 이후 우리 집은 많은 것이 변했다. 나쁜 것도 있고 간혹 사소하지만 좋은 것도 있었다. 그리고 또... 많은 것은... 변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