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 탈을 쓴 늑대보다 슬픈, 늑대인 척하는 양들에게
아기돼지 삼형제 이야기에서 살짝 언급했던
늑대의 억울함에 대해 대변해보고자 한다.
전통적인 서양 동화에서
악역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바로 '늑대'다.
(우리나라의 전래동화는
호랑이가 자주 악역으로 등장한다.)
빨간모자와 늑대, 아기돼지 삼형제,
늑대와 일곱마리 아기염소
얼추 유명한 몇가지 서양동화에서
굶주린 늑대는 사냥감을 잡아먹거나 먹으려다가
(빨간모자, 아기돼지, 아기염소)
크게 혼쭐이 난다.
늑대를 혼쭐내는 방식은 그로테스크할 지경이다.
빨간모자와 아기염소를 잡아먹은 늑대는
잠을 쿨쿨 자는 동안 사냥꾼이/엄마염소가
가위로 배를 가르고 (안일어났다고?),
돌을 가득담은뒤 배를 꿰맸으며,
돌이 가득 찬 탓에 목이 말라 물을 찾다가
물속으로 풍덩 빠져버린다.
(배에 돌이 가득찬 네발달린 짐승이, 살아남았을까?)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다가 그 지점에서는
늑대가 죽었다는 말은 해주지 못하고,
물에 빠져서 축축해졌다고 에둘러 말하고 책을 덮는다.
아기돼지 삼형제는 굴뚝으로 진입하는 늑대를
끓고있는 물에 풍덩 데쳐(익혀) 버린다.
아니, 대관절 육식동물이 배가 고파
초식동물(또는 인간)을 잡아먹은 것이
뭐가 그리 큰 잘못이란 말인가?
자기는 호랑이라 육식동물이 좋다며
연신 동생을 꿀꺽 삼켜버리겠다고 늑대를 따라하는
호랑이띠 첫째를 보고 있자니
의문의 꼬리는 더 길어진다.
생각해보면 성인들이 살아가는 사회도 비슷하다.
특히 한국 사회가 더 그렇다.
저것은 원래 내 것이고,
내가 당당히 받아가야할 보상임에도
목소리를 높이거나 쟁취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은
모난 돌 취급을 받는다.
굶주린 눈빛으로 무엇이라도 더 얻으려고
적극적인 사람은
욕심이 과하고 부담스러운 사람이 되기 일쑤이며,
저 먹이는 본디 자기 것이었노라 외치기라도 하면
대번에 이기적인 종자가 되기 쉽다.
대한민국은 초식동물이 우월한 대접을 받는 세상이다.
설령 속에 든 것이 늑대라 하더라도,
양의 탈을 쓴 늑대가 되어
초식동물을 몰래 삼키는 것이
현명하고 이상적인 사회인의 모습이다.
제 것을 갖기 위해 남과 토론하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점잖지 못하고 어른스럽지 못한 사회인의 특징이 된다.
하지만 자기 것을 제때 잘 찾아먹지 못하는 것도
어리석고 둔한 사회인으로 취급받는다.
정말이지 피곤한 세상이다.
"아닌건 아니다, 맞는 건 맞다. 제대로 이야기해보자"
하며 상대방을 끌어내는 행동은
마치 지나가는 선비의 얼굴에
냅다 침을 뱉는 행위처럼 여겨진다.
점잖은 표정의 선비 아저씨가
도포 속에 내 수박을 서리해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고백컨데, 나는 늑대처럼 살고 있는 양이다.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 더 많은 세상에서,
도리어 늑대인척 하며 내 땅의 풀을 밟히지 않으려고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매애-) 대고 매일 보초를 선다.
간혹 평안한 밤이 찾아오는 날에는
눈물에 잠겨 허우적거린다.
당신이 늑대인척 하는 양이라도,
혹은 양인척 하는 늑대라도
조금은 솔직한 세상이 덜 피곤하지 않은지 묻는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렇게 가면 속에 살아가야 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