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온한 탑을 떠나 가시덤불로 들어선 당신에게
우리는 라푼젤을
유괴당해 탑에 갇힌 불쌍한 공주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동시에, 라푼젤은
평생 엄마라 믿었던 마녀 고델로부터
안온한 보살핌을 받았다.
고델은 라푼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유괴의 비밀은 꽁꽁 숨기고
위협 없이 따뜻한 애정을 보여주려 애썼다.
이 안온한 탑은 사실 라푼젤에게
세상의 풍파로부터 격리된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의 공간이었다.
평생 엄마라 믿었던 마녀 고델의 품을 떠나,
새로운 사랑인 플린의 손을 잡고
진정한 행복을 찾았다는 동화의 결말.
하지만 우리는 묻게 된다.
그 이후는 정말 ‘Happy ever after’였을까?
우리 역시 저마다의 탑 속에서 성장을 준비한다.
내 집이 나에게 울타리인지,
감옥인지는 개인의 사정에 달린 것이지만
어찌 되었건 대학을 가거나,
직장에 들어가 정착하기까지
우리는 무수히 많은 탈출과 모험을 감행한다.
그 시작에는 늘 아름답게 반짝이는
지평선 너머 풍등의 물결이 있다.
대학만 가면, 저 시험만 통과하면,
저 직업만 가지면, 학위만 딴다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책상, 자리, 집에서
창밖의 풍등을 꿈꾼다.
그 빛만 만나면
내 인생의 행복이 시작될 것만 같은 갈증을 느끼며
기꺼이 평온했던 탑을 내려가 세상의 덤불에 부딪힌다.
하지만 탑을 내려와 마주한 세계는
기대만큼 눈부시지만은 않다.
라푼젤은 탑을 벗어나자마자 자유를 만끽하기보다,
엄마(고델)에 대한 죄책감과
처음 보는 세상을 향해 날뛰는 마음 사이에서
격렬하게 방황한다.
우리 역시 원하던 풍등을 손에 넣고도
“이게 정말 내가 원하던 삶인가?”라는
질문 앞에 멈춰 선다.
풍등을 만나러 간 세계에 오직 기쁨만 있었을 리 없다.
그곳은 라푼젤이 가진 마법의 머리칼,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을 착취하려는
또 다른 고델들이 즐비한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Happy ever after’는
풍등을 얻었을 때가 아니라,
그 반짝이는 환상이 깨진 뒤에도
자신의 본모습을 긍정하며
다시 앞을 볼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년 동안 탑의 창가에서
풍등만을 그리워해 온 당신에게,
혹은 풍등 앞에 서서 "고작 이걸 위해 달려왔나"하고
괴로워하는 (나 자신과)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우리의 삶은 풍등 앞에 도달해
또 그다음 풍등, 다음 풍등을 찾아
새로운 탑을 전전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다음 빛을 바라보는 그 순간의 희망과 행복,
소망을 품고 버티며 나아가는 그 시간들이
결국 우리를 이루는 행복의 조각들일지도 모른다.
지금 잡은 그 풍등이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탑을 나와 달려오던 그 시간이
반짝이는 풍등 그 자체보다 귀한 것이니
너무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