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 아니고 교환학생 입니다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배들을 만나면 단골 소재로 쓰이는 이야기가 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같이 공부를 하던 언니 오빠들이 다른 도시의 학교로 떠나는 날이자 일주일에 한 번 기숙사를 청소하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다들 분주했다.
“지금 안 나가면 기차 시간 놓칠지도 몰라!”
“응! 지금 나가.”
조리를 신고 급하게 뛰어나갔다.
꽁꽁 얼어붙은 러시아에서 조리라니요?! 다들 러시아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모습이 있다. 털모자, 털부츠 그리고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을 것 같은 무릎까지 쌓인 눈의 모습. 하지만 일 년 내내 춥기만 할 것 같은 러시아에도 뜨거운 여름이 있다. 러시아의 패셔니스타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짧고 강렬한 여름에는 해가 아주 뜨겁게 내리쬔다. 그날도 아주 무더운 날이었다. 기숙사 방 청소를 하다가 모두 아슬아슬하게 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다행히 차는 막히지 않았고 생각보다 빨리 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차 시간은 여유가 있었고 급하게 나온 터라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프란체스카 언니,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러시아에서 이미 자리 잡고 지내고 있는 몇 학번 위의 선배님이자 믿음직한 해결사
“릴리야, 혼자 갈 수 있겠어? 길 잃어버리는 거 아니야? 누가 좀 같이 가지?”
(모두들 내가 길치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다른 언니들이 같이 가자고 나서기 전에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까 오는 길에 화장실 어디 있는지도 봤어요. 다들 정신없는데 금방 다녀올게요.”
“괜찮겠어? 그러면 빨리 갔다 와. 이쪽으로 똑바로 가면 돼. 알지?”
가는 길을 잘 살피며 화장실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런데 나오는 순간, 모든 게 다 낯설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아까보다 더 많고 소란스러웠다. 어느 쪽으로 왔었더라. 방향이 모두 반대가 되는 순간 내 머리는 하얘졌다. 이쪽인가. 아니, 저쪽이었나 하며 길을 헤매다 한쪽으로 들어가서 기웃거리고 있었는데 말소리가 들렸다. (지금부터의 대화는 러시아어다.)
“잠깐만, 너 신분증 좀 보여줄래?”
러시아 경찰 아저씨였다.
언제 어디서나 당당한 나였지만 아무 잘못한 게 없어도 경찰 아저씨 앞에서는 왜인지 작아진다. 한국에서도 그런데 머나먼 러시아에서 경찰이라니요!
“신분증? 나 지금 친구 배웅하러 급하게 나온 거라 안 갖고 나왔는데?”
(속으로는 엄청 떨렸지만, 왜 어쩔래? 나는 당당한데?라는 표정과 몸짓으로 대답했다. 가슴은 쿵쾅거렸다. 프란체스카 언니가 어딜 가든지 학생증 꼭 들고 다니라고 했는데. 이런 일이 진짜 있을 줄이야. 엄마, 나 무서워.)
“신분증 항상 들고 다녀야 하는 거 몰라? 니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 내가 널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어? 너 혹시 집시 아니야?”
뭐... 라... 고? 집... 시?!
유럽 여행을 가본 사람들이라면 알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집시가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 넓은 의미로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유랑민족’을 뜻하기도 한다” 고 하지만 경찰이 말한 그 단어에는 나도 알고 자기도 아는 다른 뜻도 들어 있었다. 러시아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프란체스카 언니가 말했었다. 집시를 만나면 가방은 몸에서 떨어뜨리지 말고 앞으로 잘 잡아라. 그리고 대응하지 말고 그냥 빨리 지나가라고. 실제로 만난 집시들은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장난을 걸기도 했고 때론 돈이 있냐며 말을 걸기도 했다.
“나 집시 아니야. 나 톨스토이 국립대학교 학생이야! 한국에서 왔다고!” (대학교 명칭은 변경했다)
“뭐라고? 거기 학생이라고? 네가?” 하며 나를 위아래로 살폈다.
“그래!”
억울한 자와 못 믿는 자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더 멋지고 더 빠르게 러시아어로 쏘아붙이고 싶은데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내 마음보다 한참 느렸고 아마도 정중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없는데 언니 오빠들도 못 만나면 이 경찰이라도 따라가야 하나. 그러면 집은 찾아 주겠지. 하며 기숙사 주소도 말해보는 중이었다. (누가 제발 나 좀 도와줘요.)
그때 저 멀리서 카랑카랑하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릴리야!!”
“언... 니...”
나의 구원자 프란체스카 언니였다. 반갑고 마음이 놓여서 그제야 눈물이 났다.
배웅이 끝나도록 내가 돌아오지 않자 언니 오빠들과 함께 찾아다니고 있던 터였다. 별말하지 않았음에도 언니는 모든 상황을 다 파악했다는 듯 내가 하고 싶었던, 하지만 나는 하지 못했던 말들을 멋지고 빠른 러시아어로 경찰에게 쏘아붙였다. 허리에 손을 얹고 짝다리를 하고서는 한껏 당당하게 언니의 신분증을 내밀었고 얘가 어딜 봐서 집시로 보이냐며 신분증을 안 갖고 온 건 실수다.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몰라서 그랬다. 미안하다.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 하지만 너도 선량한 대학생한테 갑자기 집시라고 그러면 애가 얼마나 놀라겠냐. 지금 울고 있는 거 안 보이냐고.
한참을 언니와 나를 번갈아보던 경찰은 오해해서 미안하다며 나를 바라보고는 그래도 신분증은 꼭 갖고 다니라고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언니는 울음을 그친 나에게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네가 예쁜가 보다. 러시아 집시들은 다 예쁘거든. 호호호호. 너무 재밌다. 릴리야, 근데 너 거울 좀 보고 와. 내가 봐도 너 집시 같다. 경찰보고 뭐라 할 게 아니야. 호호호호”
커다란 유리문에 비치는 내 모습. 헝클어진 긴 머리, 발목까지 내려오는 어깨끈 원피스, 조리 사이로 보이는 까무잡잡한 발등과 발가락, 러시아의 뜨거운 햇빛에 노릇노릇하게 익은 피부. 내가 봐도 집시 같네.
경찰 아저씨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