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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Nov 08. 2023

저랑 같이 자이브 추실래요?

몸치도 환영합니다. 


남편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그날의 비밀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또 하루가 시작된다. 


7시 알람이 울린다. 당근, 애호박, 양파 야채 3종세트를 다지고 냉장고에서 두부를 꺼내 물기를 짠다.  계란 2개를 톡톡 깨뜨려 거품기로 골고루 풀어주고 물기 뺀 두부를 으깨어 준다. 두부, 다진 야채, 계란을 모두 섞고 가는소금도 솔솔 뿌린다. 식은 밥을 조금 넣고 아이가 좋아하는 옥수수통조림도 2스푼 보탠다. 달궈진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한 숟가락 크기로 동그랗게 부쳐내면 영양만점 아침 완성이다. 등을 긁어주며 엉덩이를 두드려가며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를 깨운다. 

"이든아, 일어나~ 아침이야~"

물론 처음엔 다정하다. 다 그런 거 아니겠는가. 두세 번 불러도 일어나지 않으면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성 붙여 이름 부르기가 시작된다. 눈을 비비며 겨우 일어난 아이는 아침인사를 하고 멍하니 소파에 잠시 눕는다. 엄마의 큰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식탁으로 가서 아침을 먹기 시작한다. 

"어? 내가 좋아하는 거네? 엄마, 너무 맛있어." 

케첩에 찍어서 오물오물 잘 먹는 아이를 보니 사랑스럽다. 귤을 까서 작은 접시에 담아준다. 엄마가 까주는 귤이 제일 맛있다는 아이에게 안 까줄 재간이 없다. 엄마의 귤은 사랑이다. 




천하태평 아이를 재촉해서 학교에 보내고 나면 다음은 남편차례다. 잠시 눕고 싶기도 하고 인스타 돋보기도 보고 싶지만 남편부터 보내야지. 비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한다. 안방의 암막커튼을 젖히고 실제 시간보다 10분은 더해서 다급한 목소리로 남편을 깨운다. 남편 옆의 따뜻한 극세사 이불이 몸을 끌어당기지만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보들보들한 얼굴로 나를 부르는 그곳으로 들어갔다가는, 아이의 하교시간이 되어서 나오게 될 것이 뻔하다. 무서운 녀석 같으니라고. 어두운 지하 세계를 거의 다 벗어날 무렵, 에우리디케를 돌아본 오르페우스처럼 잃게 될 것이다. 에우리디케만큼이나 소중한 아침시간을. 비밀리에 해야 할 일들을. 극세사 이불의 유혹을 힘들게 뿌리치고 안방 창문을 열어 차가운 공기를 안으로 들인다. 욕실에 물소리가 들리면 토마토껍질을 벗기고 잘라 꿀과 함께 갈아낸다. 한 잔 가득 따라두고 남은 한 잔은 통째로 들고 마신다. 설거지를 하고 남편을 배웅한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무거운 노트북과 텀블러를 챙겨 집 앞 카페로 갔다. 따뜻한 라테를 시키고는 아무도 없는 2층으로 올라가서 노트북을 켠다. 키보드의 경쾌한 타닥타닥 소리에 내발은 춤을 춘다. 역시 오길 잘했어. 엄마 말고 아내 말고 작가, 참으로 설레는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출처 - pixabay


이것저것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보이는 집 말고, 아이책상이나 식탁 말고, 커피와 노트북으로 테이블을 채울 수 있는 카페에서 작가가 된다. '눈오는겨울' 로 브런치에 글을 쓴다. 10년 전도 갔다 오고 20년 전도 다녀온다. 타임머신이 필요 없다. 상상만으로도 시간여행은 가능하니까. 생생하게 쓰고 싶어 문장을 고치다 보면 그날의 기분은 물론 날씨와 공기까지 느껴진다. 글쓰기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문장이 막히거나 써지지 않을 때에는 다른 작가님들의 글을 보기도 한다. 아이를 낳던 날로 함께 돌아가고 친정엄마와 다투었던 날로 돌아가 울고 웃는다. 생생한 글은 빠져들고 솔직한 글은 힘이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특별해지고 스쳐 지나갔던 말에서 의미를 찾는다. 하루하루 지나가는 시간이 소중하고 아까워졌다. 글로 쓰니 어제일처럼 생생한데 벌써 4년 전이다. 아이와 함께 자라는 줄 알았는데 아이만 쑥 자라고 나는 늙었다. 책모임을 하고 봉사도 하며 부지런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글을 쓰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기쁨이고 행복인 동시에 고뇌이고 초조함이다. 


시작만 하면 써질 줄 알았다. 내 머리가 내 손을 못 따라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쓸데없었다. 키보드 위에서 자이브를 출 줄 알았던 내 손가락들은 몸치가 된 것 마냥 삐걱거렸다. 써야 써지고 읽어야 써진다. 그날로 되돌아가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 때도 있었고, 기억보다 더 행복할 때도 있었다. 힘든 기억은 글로 쓰며 약을 바르고, 행복했던 기억은 마음껏 되새긴다. 쓰면서 알게 되었다





브런치, 아름다운 단어다.

"아침식사와 점심 식사를 대신하여 그 시간 사이에 먹는 식사를 말한다. 서구에서는, 대개 샴페인이나 칵테일을 곁들인다." -위키백과-

아침과 점심사이에, 식사와 함께 달달한 샴페인이나 칵테일까지 곁들이다니. 글이 저절로 써질 것 같고, 무슨 글을 읽어도 아름다울 것 같다. 


이제 자이브를 출 시간이다. 저랑 같이 추실래요?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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