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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Nov 17. 2023

따뜻한 김관장의 다 이룬 하루

2028년 11월 11일 금요일, 날씨요정의 따사로운 가을

 출간 기념회보다 더 긴장되는 <겨울 도서관 개관식> 날이다. 하늘도 내 마음을 알았는지 11월의 날씨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햇살이 따사롭다. 어제까지만 해도 때 이른 한파에 거리는 온통 롱패딩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하루 만에 이렇게 카디건만 입어도 되는 날씨가 되다니. 엄마 손잡고 개관식에 온 꼬물이들이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따뜻한 날씨 부탁드린다는 기도를 들어주신 건가? 역시 날씨요정 김관장이다. 3년 전 ‘봄 도서관’을 개관했을 때만 해도 동네에 작은 도서관을 하나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아이들도 엄마들도(물론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고모, 삼촌 모두) 편안하고 자유롭게 책을 보고 책과 놀고 스마트폰같이 책을 느꼈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이렇게나 일이 커져버렸다. 봄 도서관, 여름 도서관, 가을 도서관에 이어 드디어 오늘, 겨울 도서관을 개관한다. 걸어서 갈 수 있고, 언제든지 갈 수 있는, 소리 내어 책을 읽어도 되는 도서관, 동네마다 자유로운 내 집 앞 도서관을 만들고 싶었다. 갓 내린 커피 향과 달콤한 핫쵸코향이 가득한 곳에서 금방 튀긴 팝콘을 먹으며 보고 싶은 책을 골라 읽는 곳. 일회용이 아닌 개인컵만 가져온다면 뜨겁지 않은 핫쵸코는 무한리필이다. 더운 봄, 여름엔 아이스쵸코가 준비되어 있고 도서관 입장 100회 차가 되는 단골고객에게는 컵에 이름을 새겨 선물해 주었다. 친척집에 놀러 왔다가 따라온 아이들을 제외한다면 이름컵이 없는 아이가 없고, 컵을 무지개색깔로 갖고 있는 아이들도 수두룩하다. 식세기에서 빈백소파로 매일같이 옮겨 다니는 컵들은 책을 사랑하는 아이들의 마음만큼이나 반짝반짝 빛이 난다.





 사실, 처음에는 어색해했다.

 " 선생님, 여기서 이거 먹어도 돼요? "

 " 물론이지."

 " 팝콘도 먹으면서 책 봐도 돼요? "

 " 당연하지."

 " 정말요? 여기 도서관인데요? "

 " 응, 정말이야. 마음껏 먹고 마시면서 즐겁게 책 봐. "

 물론 처음에는 빈백소파옆에 있는 컵홀더에 컵을 끼우지 않아 쏟는 아이도 있고 팝콘을 통째로 넘어뜨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당황하며 울먹이는 아이에게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이야기해 주며 함께 치운 후, 다시 주면 두 번, 세 번 쏟지는 않았다. 아니, 세 번, 네 번은 쏟지 않았다. 굳이 아이들에게 몇 번씩 "조심해.", "쏟으면 안 돼." 이런 말들을 할 필요는 없었다. 아이들은 스스로 주의를 기울이며 마셨고 마음껏 즐겼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서 학원과 학원사이의 비는 시간을 휴대폰게임으로 보내던 아이들이 "봄 도서관"으로 왔고 이제는 매일 출근도장을 찍는다. 추운 겨울, 무더운 여름에 갈 곳이 없어 떠돌던 아이들도 도서관으로 왔다. 쭈뼛거리며 들어오던 아이들은 지금은 가장 큰소리로 인사를 하며 제집 드나들듯이 도서관에 들른다. 오손이, 도손이 12살 쌍둥이 남매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관장님 덕분이라고. 집에서도 밖에서도 휴대폰만 들여다보던 아이들이 이제는 집에서도 책을 보고 엄마, 아빠랑 눈을 맞추고 이야기 나눈다고.  맞잡은 어머니의 손이 따뜻했다.


" 아니에요. 아이들이 도서관에서 마음껏 있을 수 있도록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신 어머니 덕분이에요."





도서관에서는 영어그림책, 한글그림책을 읽어주고, 만들기, 그림 그리기, 요리하기 등의 다양한 독후활동들도 한다. 그중 가장 인기가 많은 수업은 중학교2학년 이든선생님의 "내 맘대로 레고수업"이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레고 만들기를 좋아하더니 이든이는 올해 최연소 레고 공인 작가가 되었다. 전 세계에서 28명뿐인 " LEGO Certified Professional "


”멋지다 내 아들“


내년 5월 덴마크에서 열릴 개인 전시회 준비로 바쁠 만도 한데 일주일에 한 번, 도서관 수업은 절대 놓지 않는다. 7일 내내 자신을 기다리는 꼬마레고덕후들이 눈에 아른거려 작업이 되지 않는다나. 귀여운 선생님과 더 귀여운 제자들이다.



 몇 달씩 스케줄이 미리 잡히는 바쁜 우리 슬초 브런치 동기 작가님들은 벌써부터 내년 덴마크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며 인증샷을 올리고 축하메시지를 보내온다. 모든 처음을 함께한 사모하는 우리 작가님들과의 단톡방은 언제나 바쁨과 축하로 가득하다.

 이든이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덴마크 본사에 레고 디자이너로 출근하기로 했다. 선견지명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작년에 레고 본사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파란 지붕의 예쁜 주택을 구입했다. 파란 지붕에서 나와 자전거를 타고, 혹은 걸어서 출근하는 이든이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콧노래가 들리는 듯하다. 이든이의 대학교학비까지 모두 내주신다고하니 레고 회장님 만세. 이때까지 장바구니에 쌀보다 많이 담았을 레고가 아깝지 않고, 이든이의 방 2개에 산처럼 쌓여있는 레고박스들이 오늘따라 더욱더 사랑스럽다.




 오후 6시, 도서관의 불이 꺼지고 나면 책모임이 시작된다. 누구든 미리 예약만 하면 도서관 1층의 회의실을 빌려준다. 사서선생님들의 가장 큰 걱정이었던, 지저분하게 혹은 함부로 사용할지도 모른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용하셨던 모든 분들은 내 집처럼 깨끗하게 사용하셨고 간식들을 드시고는 더 가득 채워두고 가셨다. 선의는 또 다른 선의를 낳는다. 동네분들은 아이가 자라며 보지 않게 된 책들을 기증해 주시고 원데이 수업에 재능기부를 하고 싶다며 연락을 주셨다. 포도가 한 알 한 알 영글어 가듯이 작은 마음들이 모이면, 눈덩이가 굴러가듯 점점 커진다. 봄햇살처럼 마음이 따뜻해진다.   


’ 봄, 여름, 가을 도서관 ‘ 은 구청이나 시의 지원을 받지 않는 작은 도서관들 중에서 가장 책이 많고 프로그램들이 활발하게 운영된다. 이 모든 것들이 무료로 가능한 이유는 모두 애정하는 독자님들 덕분이다. 나왔다 하면 베스트셀러, 이달의 책,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니 이제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질 만도 한데 여전히 떨린다. 교보문고와 예스 24의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책을 볼 때마다 마음속엔 8월 한낮의 수컷매미가 들어온다. 찌르르 찌르르 매미가 나가고 나면 노랑나비가 들어온다. 팔랑팔랑 힘차게 날갯짓을 하고 떠난다. 모두가 떠나고 나서도 진동은 남아있다.  


 "내 새끼들, 사랑받고 있구나."



 

도서관 개관식이 끝나면 독자님들을 만나러 간다. 이번엔 또 어떤 독자님들이 와 계실까 생각하면 결혼식 전날처럼 설렌다. 결혼식을 벌써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새롭게 나온 책을 들고 독자님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여행지의 입국장을 들어설 때의 마음과 다를 바 없다.


 독자님들과 헤어지고 나면 진짜 입국장에 들어갈 차례다. 영국에서 열릴 슬초 브런치 동창회에 참석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입이 근질거린다. 한 달에 한 번은 줌으로 만나고 수시로 카톡에서 안부를 주고받는 그녀들이지만(영화, 드라마,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그녀들의 이름을 더 많이 보기는 한다.) 이렇게 직접 모두가 함께 만나는 것은 1년에 딱 한 번이기 때문이다.  매년 11월의 두 번째 금요일에는 어떠한 약속도 잡지 않는다. 5년 전부터 정해진 약속이다. 한국이든, 영국이든, 덴마크든 우리는 함께 한다. 일주일 같은 이틀을 함께 보내며 1년 치의 회포를 푼다.


출처- pixabay

 삼일 후엔 모리셔스로 가는 비행기를 탄다. 17년 전 남편과의 신혼여행지. 마크트웨인이 말한 그곳.

"신은 모리셔스를 본떠 천국을 만들었다."

전시회 준비로 매일같이 레고에 파묻혀있는 이든이도,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먼저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랑하는 남편도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정작 일을 그만두고 싶어 하지 않아 셔터맨이 되지는 못했지만 워라밸을 지키며 즐겁게 일하는 남편은 이제 책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고 한다. 5년 전까지만 해도 남편은 책 있는 삶을 상상할 수 없었다. 5년에 한 권도 읽지 않던 남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이 남자는 정녕 내 남편이 맞는 것인가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인덕션에 열이 오르듯이 남편은 변해갔다. 아내의 글이 궁금하던 남자는 아내의 책을 읽게 되었고 빠져들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도리도리시절을 지나 걸음마를 떼고 뛰기 시작했다. 뒤늦게 책과 사랑에 빠졌다. 여행 갈 때 책을 챙기는 것을 절대 이해하지 못했던 남편은 선베드에 누워 읽을 거라며 일주일 여행에 책 10권을 챙겼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는 말은 정말이다. 증명되었다. 이런 도둑질이라면 언제든지 두 팔 벌려 환영이다. 수영선수같은 어깨, 테니스장에서 골고루 탄 피부와 과하지 않은 탄탄한 팔과 다리, 드문드문 갈라진 배까지 딱 내 스타일인, 책을 사랑하게 된 그 남자가 빨리 보고 싶다. 이번에도 게임이 되지 않을 엄마는 번외경기로 남겨두고 아빠와 아들의 한판 수영 승부가 펼쳐지겠지. 아빠키에서  딱 10cm 모자라는 이든이는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 아빠를 따라잡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고 아빠는 내심 183에서 이든이의 키가 멈췄으면 하는 마음인 듯하다. 아빠보다는 안 컸으면 좋겠다나. 키는 아빠를 닮았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이룬 엄마는 이제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책도 50쇄를 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다음 도서관은 어떤 이름으로 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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