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릴리 Feb 27. 2024

언니, 저 마음에 안 들죠?

모르는 남자의 차에 타버렸다.


“누구세요?”


뒷좌석에 함께 앉은 남자가 나에게 물었다.


“네? 저는… 이거 동그라미 대학교 가는 차 아닌가요?”

“연석아, 네 여자친구 아니야?”


이번엔 조수석에 앉은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내 옆에 앉은 뒷좌석 남자에게 말했다.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동그라미 대학교를 가는 차를 탄 나에게 (카풀하려고 같이 타놓고) 이제 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너는 누구냐고 묻는 건 왜지? 그것도 모자라 연석이(아마도 내 옆에 앉은 남자의 이름으로 추정된다.)의 여자친구냐니. 관심의 물음이 아니다. 이제는 운전석, 조수석, 뒷좌석의 남녀 세 명이 모두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게 무슨 일이지? 뭐가 잘못된 거지? 그러고 보니 차에 탈 때부터 운전석에 앉은 남자도 룸미러로 자꾸만 나를 쳐다보았었다.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운 좋게도 한 번만에 학교에 가는 버스가 있었다. 하나 문제는,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는 나의 불치병이었다. 1학년은 특히나 기본으로 세팅되어 있는 시간표에 몇몇 교양 수업들을 신청하는 거라 9시 수업이 유난히도 많았다. 10분만 더 일찍 나가면 되는데 아침의 10분을 단잠과 바꾸니 매일 아침 0교시는 체육이다. 그것도 스피드와 지구력을 모두 요하는 오래 달리기. 문제는 그런 아이들이 많다는 거다. 그것도 아주. 숨을 헉헉거리며 버스정류장이 보이면 도착하기도 전에 걱정이 앞선다.

'탈 수 있을까?'

이미 많은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다. 중고등학생처럼 교복을 입고 있진 않지만 같은 대학교 학생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지금은 모르는 사람과 같은 차를 탄다는 게 상상도 안 되겠지만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넘은 이야기이다. 그때는, 그러니까 라테는 말이야, 버스정류장에서(목적지가 같은 대학교인 경우가 많다. 자주 보는 얼굴도 많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새벽까지 과제를 하다가 늦게 잤거나 새벽까지 술을 먹다가 몇 시간을 자고 일어났거나 아침잠이 많거나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지각을 코앞에 두고 있다.) 카풀을 해서 택시를 타고 함께 학교에 가기도 하고, 친구를 태우다 옆에 있는 모르는 같은 학교 학생을 태워주기도 했다. 9시 안에 무사히 도착하는 마지막 버스를 놓치고 나면 누군가가 택시비를 나눌 사람을 구한다. 가끔 택시를 함께 타고 가 본 적이 있다. 학교 앞에 도착하면 4분의 1, 또는 3분의 1로 택시비를 나눈다. 깔끔 그 자체이다. 그리고 오늘은 찰나의 순간에 버스를 놓쳤고 택시 카풀마저 눈앞에서 떠나버렸다.


지금처럼 정류장 전광판에 버스 도착 예정시간이 표시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언제쯤 버스가 온다는 걸 대략 알고 있었다. 안전하게 9시 이내에 강의실에 입성하는 버스와 아슬아슬하지만 전력질주를 한다면 간당간당하게 9시에 딱 맞추어 강의실에 들어갈 수 있는 버스가 있다. 그 버스마저 놓치면 지각이다. 하필이면 성도 ㄱ이어서 출석을 부르는 중간에 들어가더라도 이름은 지나가버린 후다. 억울하지만 이제와 스무 살까지 열심히 키워준 아빠를 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오늘은 제발 뒤에서부터 이름을 부르면 좋겠다는 기도를 해보지만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고 2대의 버스 모두 놓쳤다. 이제 지각만이 기다리고 있다. 이 수업은 정말 더 지각하면 안 되는데. 조바심이 온몸에 흐른다. 그냥 혼자 택시를 타고 가기엔 택시비는 무겁고 지갑은 가볍다. 온갖 경우의 수를 생각해 가며 동동거리고 있는데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조수석 창문이 열리더니  “동그라미 대학교 가시는 분?” 하며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웃는다. 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버스정류장에서 많이 봤고 학교 앞에서 내릴 때도 같이 내렸던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간다. 내 옆에 서있던 여자는 조수석에 타네? 어쩌지... 탈까 말까... 더 망설이다가는 이 차도 떠나버리고 지각 확정이다. 운전석의 남자, 인상이 나쁘지 않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모르는 사람의 차에 타지 않는다. 그날은 빨리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간절했던 건지 아니면 뭐에 씌었었는지 덜컥 타버렸다.



사진출처 - pixabay






운전석, 조수석, 뒷좌석의 눈 여섯 개가 나를 바라본다. 서로를 바라본다.


‘너 아는 사람이야?’

‘아니.’


여섯 개의 눈은 서로를 바라보며 입이 아닌 예의를 갖춘 눈으로 묻고 답했다. 그리고 다시, 세 사람 중 그 누구와도 아는 사이가 아니라는 게 밝혀진 여자를 물음표를 한껏 머금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자의 얼굴은 긴장감, 당황스러움, 당혹감을 어느 것 하나 숨기지 못하고 마음껏 드러내며 붉어졌다. 워터파크에서 옷을 벗고 샤워실로 들어간다는 것이 문을 잘못 찾아 수영장으로 나가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사건은 이랬다.


운전을 하는 남자와 버스정류장에서 탄 남녀 2명은 모두 친구사이였다. 그 버스정류장에서 친구 둘을 태워가기로 했고 그 앞에서 “동그라미 대학교 가시는 분?” 하며 말했을 뿐이다. 아니, 망설이는 나를 보며 웃었다.(옆의 친구에게 웃은 거겠지.) 두 사람이 차에 타는 걸보고 혼자 착각해서 그 차에 타버린 것이다.


“아, 죄송해요. 제가 친구들 이름을 불렀어야 했는데, 오해하시게 했어요. “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사과를 했고 다들 웃음을 참았다. 그 와중에 웃지 못하는 여자는 10월의 산수유 열매보다도 더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착각했어요. 죄송합니다.”


차를 같이 타고 가자며 붙잡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내정신이 아닌 상황이었고 죄송하다는 말을 또 한 번 하며 차문을 열었다. 도망치듯 차와 멀어졌다. 그날, 그 후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학교에 어떻게 갔는지. 집에는 어떻게 돌아왔었는지. 한동안은 일찍 학교에 갔다. 지각을 하고 싶지 않아서라기보다는 그 세 사람을 혹시나 만나게 될까 봐. 다행스럽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여름방학이 시작되었고 뜨거운 햇살과 함께  기억도 조금씩 멀어졌다.





시트콤의 한 장면 같은 그날의 일이 로맨틱한 영화가 되려면 운전석의 남자나 남자친구가 될 뻔했던? 뒷좌석의 남자와 또다시 운명처럼 만나야 한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을 걸고 사과의 의미로 밥을 사고 대화는 하는 것마다 너무 잘 맞다. 그렇게 캠퍼스커플이 되어 영화 같았던 우리의 첫 만남에 대해 두고두고 이야기하겠지만 (인정한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 현실에서의 여자는 그들을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했고 여름방학이 지나서는 만났어도 알아보지 못했을 거다.


아. 어쩌면 만났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나를 보며 자꾸 웃던 사람이 있었다.


잡았다, 요놈!


사과 한 번 더 하려고요.


죄송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