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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야매 Aug 13. 2019

밤길 조심해, 미국에선 농담 아닌 이야기

미국의 불안한 치안에 대하여

LA에서 내가 자리 잡은 곳은, 한인타운 조금 밑에 위치한 피코 유니언이라는 이름의 동네다. 벌써 6개월 째 이곳 하숙집에서 묵고 있다. 그리 깔끔한 동네는 아니지만, 집세도 다른 동네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고 회사와 가까워 나름 만족하며 지내고 있다.


종종 사람들에게 내가 피코 유니언에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면, 그들의 반응은 항상 비슷하다. 거기 위험한 동네인데 괜찮냐는 것이다. 나의 대답도 항상 비슷하다. 나는 괜찮다. 안 괜찮으면 당신들이 새 집을 마련해 줄 것도 아니기에 굳이 엄살을 피우고 싶지 않다. 그냥 살만하다는 답변을 돌려주고 화제를 전환하곤 한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보통 나는 해가 떨어지고 난 후에는 어지간해서는 집밖으로 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바깥 상황이 어떻든 이불 속은 안전하다. 창문을 닫아놓고 선풍기를 밤새도록 틀어 놓지 않는 한, 아닌 밤중에 요단강 건널 일은 다행히도 없다.


하지만 나도 사회적 동물인지라 이불 밖으로 나서야 할 때가 있다. 일정이 끝나고 밤 늦게 귀가하기도 한다. 해 떨어진 피코 유니언은 모두가 입 모아 말하는 위험한 동네다. 대부분은 우버를 타고 집 앞까지 오지만, 매번 그러기엔 나의 지갑사정이 넉넉하지 못해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때도 있다.


이렇게 차라도 많이 다니는 길은 그나마 조금 안심이 된다

우리 집과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은 맥아더 파크 역이다. 현지인들에게도 악명이 높은 곳이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마약 중독자들이 많다고 한다. 그 소문이 진실인지는 직접 물어보지 못해 알 수 없으나, 분위기가 흉흉하다는 것만큼은 피부로 쉽게 느낄 수 있다. 특히 해가 떠있을 때는 상주하던 경찰이 퇴근하고 없는 밤 시간이 되면 더욱 을씨년스러운 공기가 머무르는 곳이다.


처음으로 한 밤 중에 맥아더 파크 역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갔던 날은 공포의 연속이었다.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다 시비에 한 번 걸렸으며, 그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다시 한 번 시비에 걸렸다. 그리고 집으로 걸어가던 도중에도 또 다시 걸렸다. 신체적 접촉이나 실질적 피해는 없는, 이 곳 기준에서는 나름 착한 시비에 불과했지만, 그간 흉흉한 소식을 너무 많이 들은 지라 겁에 잔뜩 질렸었다.


한동안은 무서워 지하철은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이제는 나름 시비에 걸리지 않는 노하우가 생겨 필요에 따라서는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곤 한다. 노하우란 아주 간단하다. 눈가리개를 쓴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빠른 걸음으로 집만을 향해 걷는 것이다. 일단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불한당들의 관심을 끌 일도 없고, 혹시 끈다 할지라도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으니 굳이 쫓아오지 않는다. 이어폰을 귀에 꽂음으로써 ‘나는 너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위험한 거리를 돌파하고 집으로 돌아와 대문을 닫는 순간, 이제 안전하다는 생각과 함께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방 안에 들어와 양말을 벗고 침대에 기대 누우며 한탄한다. 우리 집 앞 동네를 걸어 오는데도 이렇게 큰 용기가 있어야 한단 말인가!


좋지 않은 치안에서 비롯되는 위험은 비단 외국인인 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현지인들에게도 이곳의 치안은 또한 위협이다. 얼마 전, 유명 래퍼 도끼가 LA 한인타운의 한 설렁탕 집에서 귀중품을 도난 당한 적이 있었다. 차 안에 두고 내린 가방을 누군가 창문을 깨고 훔쳐 달아나 버렸다. 나 또한 자주 가던 식당이어서 깜짝 놀란 마음에 회사 동료들에게 사건 이야기를 꺼냈다. 그들의 반응이 놀라웠다. 그 곳 치안이 좋지 않은 것을 뻔히 알면서도, 차에 비싼 물건들을 두고 내린 사람 잘못이라는 것이다. 도끼가 인스타그램에 직접 올린 글에 따르면 경찰과 경비원들마저도 차에 가방을 놔둔 것이 잘못이라고 했다고 한다.


피해자에게 피해의 책임을 되묻는 행태다. 이런 반응이 실망스러웠지만, 또 한 편으로는 미국인들이 평상 시에도 범죄에 얼마나 노출되어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항상 범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태도가 몸에 베어있다는 말은, 곧 그만큼 일상적으로 범죄에 노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주변에 나쁜 사람이 없다면 굳이 나쁜 사람을 조심할 이유가 없다. 미국에선 항상 나쁜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인질극이 있었던 그 가게, 사람들이 아무일도 없었다는 양 쇼핑을 하고 있다

며칠 전 한인타운에서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담배가게 직원과 시비가 붙었다가 분을 참치 못하고 들고 있던 총으로 직원을 쏘아버렸다. 막상 쏘고 나니 겁이 났는지 주변 상점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붙잡고 4시간을 경찰과 대치했다. 다행히 총을 맞은 사람도 생명에 지장이 없고, 인질로 붙잡혔던 사람들도 별 일 없이 구출됐다. 대낮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 다음 날, 그 사건이 벌어졌던 거리를 가게 됐다. 가면서도 어제 그런 일이 있었다 생각하니 괜히 심장이 쿵쾅댔다. 그런데 막상 그 사건이 났던 상점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정상 운영 중이었다. 사람들도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안에서 쇼핑을 하고 있었다. 괜히 나만 유난 떠는 이상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날 회사 사람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신문 1면에 대문짝 하게 기사가 났음에도, 인질극은 그들에게 단순한 가십거리였다. 전날 야구 경기 결과를 나누듯이 어제 그런 일이 있었구나 정도의 감상이 끝이었다. 이런 종류의 범죄 소식에 무뎌져 있는 탓인 듯 했다.


미국의 거리는 안전하지 못하다. 제 정신이 아닌 홈리스들과 누군가의 바지춤에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총이 거리의 모든 이들을 위협하고 있다. 다운타운에서 밤늦게 귀가하다 묻지마 폭행을 당해 귀국 길에 올랐다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려면 항상 주변을 경계해야 한다. 미국인들을 무뎌지게 만든 범죄 소식 중 하나가 되어 가십거리로 소비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차 안에 물건을 두고 내리거나 밤 늦게 귀가하는 행동이 잘못인지, 아니면 그 행동들을 잘못으로 만드는 이곳의 치안이 문제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이 곳에서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그런 행동들을 삼가야만 한다. 우리 집 앞 거리조차도 밤산책할 수 없는 곳에서, 한국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밤거리를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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