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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민족 정체성을 결정하는 건 무엇일까?

by 김규리

한 사람의 민족 정체성을 결정하는 건 무엇일까?


영어 공부도 할 겸 ‘매달 한 권의 영어 원서 읽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두 번째로 읽은 책이 바로 애플 TV 플러스에서 드라마로도 제작된 <파친코>인데,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진 작가가 약 20년 넘는 집필과 연구 끝에 완성한 장편 소설이다. 그녀가 자란 이곳 뉴욕에서 책을 읽어서일까, 책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녀의 인터뷰까지 유난히 와닿는 구절이 많았다. 이 작품은 1910년 일제강점기부터 1989년까지, 일본에 정착한 재일 조선인 가족의 4대에 걸친 삶을 따라가는 가족 연대기다. 이 기나긴 이야기를 딱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이 책은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존재로 살아가는 경험’을 담아냈다.


그 땅에 속하지 못한 존재로 살아가는 경험이라니, 한국에서 태어나 당연하게 한국 시민권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잘 고민해 보지 않을 문제이기도 하다. 세계 어디서나 그렇겠지만, 스스로 시민권자라는 특권을 주기적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처음부터 가지고 태어난 것에 특권 의식이 생기기란 어렵다. 나 역시 한국에만 머물렀다면 낯설게 느껴졌을 ‘시민권자’와 같은 단어들이, 지금은 뉴스에서도, 일상 대화 속에서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들려온다. 그래서 책이 다루는 주제가 미국 이민자 출신 작가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한국에서 출퇴근 시간 지하철에 앉아 있으면, 주위에 대부분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적어도 내가 살던 부산에서는 그랬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당연히 한국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누가 미국인인지 겉만 보고는 판단할 수 없다. 머리색, 피부색, 눈동자 색과 상관없이 미국 시민권이 있으면 미국인이다. 또는 시민권은 있지만 자신이 태어난 나라로 국적을 설명하는 사람도 있고, 미국인이면서 영어 학원에 등록해 알파벳부터 배우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미국인을 미국인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하는 건 무엇일까? 그리고 한국인을 한국인답게 만드는 것 또한 무엇일까? 뉴욕에 있으면서 자연스레 이런 질문들이 떠올랐다. 국적이라는 제도적 틀을 넘어, 민족 정체성은 과연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한국인이지만 한국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한국의 정규 교육을 거치지 않았고, 나와 국적이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며 성인이 되었다. 비록 친구들의 국적이 한국은 아니었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누구보다 한국인처럼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자라면서 그 사실이 내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기에, 단 한 번도 그들의 국적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민족 정체성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게 된 건 중학교 졸업여행으로 대만에 갔을 때였다. 출입국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우리가 다른 줄에 서게 되면서 나는 처음으로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깊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행 중에 만난 대만 사람들이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해했을 때, 자연스럽게 ‘한국에서 왔어요’ 혹은 ‘한국 사람이에요’라고 표현하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와 기준이 무엇일지 생각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쓰며 자랐고, 한국 문화를 접하면서 성장해 왔다면, 여권의 색과 상관없이 나를 한국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을까.


최근 미국에서 만난 한 브라질 친구가 내게 북한에 관해 물어본 적이 있다. 정중하고 또 호기심 가득한 질문이었다. 친구는 북한에서 탈출해 한국으로 넘어온 사람들이 한국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이와 같은 질문이 북한이라는 특정한 상황을 넘어 한국인이 자신과 다른 언어, 자신과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묻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고. 우습게도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내가 지금까지 읽은 유튜브 댓글이었다. 현실 세계의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상냥하고 또 따뜻하고,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것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유독 유튜브 댓글 창에 들어가는 순간 나는 정반대의 세상을 맞닥뜨리게 된다. 자신을 어두운 그림자 밑으로 숨길 수 있는 세상에서 드러나는 잔혹함은 단순한 차별을 넘어 증오로 가득하다. 나와 국적이 다른 사람을 향한 증오를 넘어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향한 증오, 나와 선택이 다른 사람을 향한 증오. 나와 다른 모든 것에 대해 무한정의 증오를 생성해 낸다. 나는 한쪽으로 치우친 대답을 하지 않기 위해 양쪽 세상을 동시에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파친코>를 다 읽었을 때, 나는 이민진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져서 그녀의 인터뷰를 찾아봤다. 그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조승연의 탐구생활>에서 조승연 작가가 한 말이었다. (이 인터뷰는 영어로 진행되었다) “저는 강의할 때 한국은 낯선 개념이 있다고 말하곤 하는데, 국어 말이에요. 한국의 언어죠.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교육 및 행정 표준 언어로 영어를 사용하잖아요. 전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고, 그래서 영어는 미국에서만 사용하는 언어라고 할 수 없잖아요. (…) 하지만 일본과 한국은 매우 특별한 경우인 거 같아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다른 곳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죠. (…) 국가의 국경과 언어 집단의 국경이 일치하는 이 상황은 문화, 민족, 국가의 경계가 일치하지 않을 때 그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특유의 심리를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


증오란 결국 무지에서 비롯된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모르는 것을 끊임없이 배우고 이해하려는 과정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책임에 가깝다. 나는 인터뷰를 보고 나서 ‘민족 정체성’을 정의하는 몇 가지 기준을 찾아봤다. 우선 첫 번째는 혈연과 출신이다. 나의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피, 그리고 내가 태어난 나라가 여기에 포함된다. 두 번째는 문화적 경험이다. 성장 과정에서 체득한 언어와 음식, 관습, 교육, 생활환경이 있다. 세 번째는 자기 인식이다. 외부의 시선과 무관하게, 스스로 누구라고 느끼는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회적 인정과 주변 인식이다. 결국 민족 정체성은 혈연과 출신, 문화적 경험과 자기 인식, 그리고 사회적 맥락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자기 인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파친코>를 쓴 이민진 작가처럼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영혼이 한국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면, 나는 자신을 한국인이라 떳떳하게 부를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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