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싸우길 잘했어
그와 싸웠다. 최근 누군가와 다툰 기억을 구석구석 찾아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만큼 오래되었다. 웬만하면 맞춰주고, 딱히 싸울 만큼 친하지 않을뿐더러, 이상한 낌새가 보이는 사람은 멀리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연애하는 동안은 늘 이성보다 감정이 앞선다. 그가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오는 안심과, 내가 그를 좋아해서 오는 섭섭함이 아주 오랜 시간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분노를 불러내었다.
정말로 나타났다. 영화 인사이드아웃 2에서 갑작스레 찾아온 사춘기로 인해 라일리의 마음속에 새롭게 등장한 감정 ‘불안이’처럼. 처음 연애다운 연애를 시작한 내 마음속에도 잠잠하던 ‘앵그리’가 등장했다. 하지만 내 안의 앵그리는 화가 치밀수록 오히려 차분해지는 아이였다. 나는 그에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조곤조곤한 말투로 따지기 시작했고, 그가 다시 반격에 나섰다. 그러자 문득 얼마 전 유튜브에서 본 어느 정신과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결국에는 그 사람을 싫어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마치 나의 남자 버전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나의 남자 버전답게 똑같이 차근차근 따지려 하자, 꼭 거울을 마주 보는 기분이 들어 더욱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렇게 우리는 7월의 마지막 3일 동안 서로의 밑바닥을 조금 보여주었다. 잔뜩 예민해져서 오가는 말들이 모두 가시처럼 콕콕 박혔다.
그러다 3일째가 되던 7월의 마지막 밤. 나는 답답한 마음에 밤 산책을 하러 나갔다. 아파트 뒤쪽에 나무 몇 그루가 심겨 있어 걷기에 좋은 곳이었다. 한두 바퀴쯤 돌며 초록색 자연을 따라 걸으니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어떤 감각이 열리는 듯했다. 문득 그를 바꿀 게 아니라, 내가 바뀌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를 위해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포용력이 넓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이해심이 깊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나는 결심이 서자 시차가 있어 아직 자고 있을 그에게 문자를 보냈고, 다시 내가 자려고 할 때쯤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결심했어’라고 비장하게 운을 띄웠다. 비록 11,000km나 떨어진 곳에 있지만, 수화기 너머에서도 그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나는 걸으며 떠올랐던 생각을 솔직하게 전했다. 당신을 위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이다. 이번 일로 내 마음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고, 당신을 좋아하는 마음은 그대로라며 그를 안심시켰다. 잠깐의 침묵 뒤에 그는 오히려 자신이 더 미안하다며 내게 잘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서운했던 만큼 우리의 통화는 밤새 이어졌다.
그와 싸우길 잘했다.
이번 다툼으로 나는 그가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알게 되었다. 조심해야 할 주제가 무엇이고, 서로의 발작 버튼이 어디에 있는지 이제는 안다. 나는 그의 말을 오해하지 않기로 하고, 그를 조금 더 믿어보기로 했다. 물론 타인의 말을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나에 대한 믿음도 함께 키워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가 나를 얕잡아 보거나 깎아내릴 리가 없다는 상대를 향한 믿음과 나는 그런 취급을 당하거나 낮춰 볼 사람이 아니라는 자신을 향한 믿음 말이다. 그는 그런 의도로 말했을 리가 없고, 나 역시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가 내뱉은 말을 하나하나 곱씹다 보면, 거기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열등감, 트라우마, 박탈감, 후회, 부끄러움 같은 과거의 먼지가 쌓여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것을 딛고 일어선 긍정적인 마음, 예쁜 말투, 선한 시선, 따뜻한 분위기와 깊은 이해심이 선물처럼 돋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상대방의 진짜 마음을 알아주기 위해서는, 나 역시도 그것을 알아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말을 오해하지 않을 노력, 빠르게 판단하지 않을 노력,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하려는 노력 말이다. 당연히 이 모든 과정을 이해하려면 부딪히는 것이 먼저다. 나는 그를 만나고, 사랑하고, 또 싸우면서 더욱 성숙한 사람이 되고자 마음먹었다. 그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번 싸워보고 싶다고 장난스레 했던 말이 이렇게나 빨리 다가올 줄이야. 하지만 덕분에 우리는 더욱 단단해진 사이가 되어 8월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 싸우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