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대로
“언젠가 조국을 그리워하며 죽을 겁니다.” 한때 나는 이 문장을 농담처럼 말하고 다녔다.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이 좁고 답답하게 느껴질 때마다 내뱉는 문장에 더욱 힘을 실었다. 나는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었다. 항상 침대 옆에는 민트색 캐리어를 세워 놓았다.
나에게는 12년 전 일본에서 만난 소울메이트 태국인 친구가 있다. 외지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같은 어려움이 있었고, 한국이 일본보다 오히려 태국과 더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치과에 다녀와 한쪽 볼이 통통 부어있던 나를 자기 자전거 뒤에 태워 위로해 주던 다정한 친구였다. 이제는 호주에 정착한 지 8년 차가 되어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을 걸어가고 있었다. 서로가 만나기 전 학창 시절에 우리 둘 다 대만 가수 주걸륜의 소녀팬이었는데, 곧 멜버른에서 그의 콘서트가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친구는 내게 호주에 오면 먹여주고 재워주겠다며, 코로나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나의 역마살을 자극했다. 마침 하는 일이 비수기에 접어들면서 떠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비행기와 콘서트 표를 예매하기까지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단연코 그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거기서 만난 유머러스한 사람들과 반짝이는 호주의 날씨는 한국을 떠나기 전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던 내 회색빛 우울을 모두 거두어 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태어나 처음 본 수백 마리의 무당벌레였다. 나를 쫓아다니는 건지 정말 어딜 가든 볼 수 있었다. 드넓은 해변의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던 조그마한 무당벌레를 마른 모래 위로 구해주기도 했다. 무당벌레가 몸에 닿으면 결혼과 관련된 행운이 찾아온다는 속설이 있다. 어릴 때 엄마가 내게 무당벌레 모양의 목걸이를 채워주며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 만나지 못한 상대가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상상하니 마냥 기분이 좋았다. 태어나 처음 보는 대규모의 해변과 뼈가 시릴 만큼 시원한 진파랑의 바다 덕분에 잠시나마 한국의 추운 계절을 잊을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나는 너무나도 호주에 살고 싶었다. 부엌 식탁에 마주 앉은 친구가 예언자의 목소리로 ‘우리 같은 사람은 떠나야 해. 꼭 호주가 아니어도 좋으니, 캐나다든 미국이든 어디든 떠나’라고 말했을 때 나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죽하면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까지 찾아봤을까. 비자를 신청할 수 있는 나이 제한까지 아슬아슬하게 4개월 정도 남아있었다. 하지만 막상 한국에 돌아오자, 나의 사고 회로까지 더불어 제자리에 돌아온 듯했다. 한국에는 내가 먹고 살아갈 직업이 있고, 가끔 강의할 기회도 있고, 내 새끼 같은 (푸들) 양파와 룸메이트처럼 편안한 부모님과, 내 차, 내 책, 내 물건이 모두 여기에 있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한국을 떠나지 못할 거로 생각했지만, 나만의 세이프 존(안전하고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는 건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공항에서 수화물을 찾자마자 걸려 온 전화를 시작으로 나는 미친 듯이 일만 하였고, 바쁘게 살다 보니 어느새 비자 신청 기간이 만료되었다.
그런데, 그런 내 앞에 뉴욕에 사는 그가 나타난 것이다.
호주에서 돌아온 다음 날부터 나는 매일 미국인 상대로 일을 했다. 직업 특성상 했던 말을 매일 반복해야 하는데, 미국 손님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반은 농담으로 뉴욕에 가는 것이 내 버킷리스트라고 말했다. 단지 대화를 이어 나갈 요량으로 뉴욕의 유명한 재즈 공연을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내 레퍼토리였다. 솔직히 말해서 내게 미국이란 도무지 관심이 가지 않는 나라 중 하나였다. 주로 유럽 사람을 만날 기회가 많았기에 미국식 영어 발음도 낯설었다. 하지만 나는 뉴욕에 가고 싶다는 거짓말을 매일 밥 먹듯이 해댔고, 그것은 곧 현실이 되어 뉴요커인 그가 내 삶으로 들어와 나를 진짜 뉴욕으로 부르고 있었다.
나는 이 사건을 ‘계획한 대로는 되지 않았지만, 말한 대로는 됐다’라는 제목을 붙여 늘 마음속에 지니고 다닌다. 비록 내가 바라던 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지나고 보니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 오히려 다행이었던 일이 많았다. 그리고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았지만, 내 계획보다 더 멋진 일이 생기기도 했다. 정말 모든 게 다 이루어졌다. 말하는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