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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모의 선물

나도 자라고 있었다

by 김규리

거울을 본다. 늦봄의 잔디처럼 이마를 따라 수북하게 자라난 잔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작년 여름 공항에서 일할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매니저님이 “규리 씨, 확실히 머리숱이 많이 없어졌네.”라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한 손에 움켜쥔 머리카락의 양이 영 볼품없어서 충격이었다. 미용실에 갈 때마다 땜빵이 있으면 솔직하게 알려달라고 묻는 습관이 생겼다. 사람과 헤어짐은 나를 슬프게 했지만, 머리카락과 헤어짐은 나를 우울하게 했다. 내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정서적 감각과 내 몸의 일부가 ‘실제로’ 떨어져 나가는 것은 다른 차원의 고통이다.


나는 그때부터 수많은 유튜버의 영상을 섭렵하며, 머리숱을 늘리기 위한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바이오틴 영양제, 두피 에센스, 마사지 빗, 탈모 방지용 샴푸 등에 내 월급을 모두 투자했다. 개 같이 벌어서 돈으로 되돌릴 수 있는 건 모두 되돌리고 싶었다. 우울한 것도 우울해 죽겠는데, 끝내 내게 돌아오는 것이 탈모라니. 고작 탈모 따위라니! 이만큼 억울한 일도 없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애지중지하며, 가끔은 탈모라는 존재 자체를 잊기 위해 더욱 바쁘게 지냈다. 그러자 머리카락은 정말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라났다. 잃어버린 것이 새로이 나기까지 이처럼 오랜 인내가 필요하다. 비어있는 자리에 다시 소소한 희망이 차오를 때까지 말이다. 상처는 곧 아물 테고, 분명 새살이 돋아날 것이라 믿고 기다렸다. 그러자 짐승의 털로 널브러져 있던 화장실 하수구도 점점 제 얼굴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가끔은 모든 걸 잊고 하나에 열중하며 지내는 것도 도움이 되었다. 어느덧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다시 여름이 찾아왔다.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영양제를 씹어먹으며 효과가 없는 것 같다고 초조해하던 내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기다린 보람 끝에 잔머리가 수북이 자란, 잘 먹고 잘 잔 얼굴의 내가 거울에 비친다. 에센스의 효과인지 아니면 그저 스트레스의 원인이 사라져서인지 모르겠지만, 폭풍우는 지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빗물을 머금은 빼곡한 새싹 같은 머리카락과 함께 내면의 평화가 찾아왔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시간에 그저 감사하면서, 그와 걸맞은 노력을 하면 나아지지 않을 것도 없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머리카락이 자라면서 나도 자라고 있었다. 무엇보다 풍성한 머리카락을 가지고 뉴욕에서 그를 만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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