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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연 Feb 16. 2022

시집갈 때 써라

어쩌면 외할머니께 받은 마지막 용돈

명절을 앞두고부터 엄마가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외할머니의 꿈에 부모님이 자주 나오신다며, 이제 본인을 데려가려고 하신다는 이야기를 하신다고.


이번 설날에는 생의 마지막을 예견하시는 것처럼 자꾸만 아끼던 물건을 나눠주시고

좋아하는 게 있으면 모든 걸 가져가라고 몇 번이고 말하셨다.



외할머니가 엄마한테 준 노란 양말은 장롱 깊숙한 데서 몇 년은 묵었던 물건이었다.

엄마는 색이 너무 튄다고 신지 않았는데 왜인지 나는 그 양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 아무도 신지 않아 장롱 한켠에서 엄마한테까지 온 인기 없는 새 노란 양말을 신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노인이라는 존재가 어쩌면 장롱 속의 이 노란 양말처럼. 누군가를 한 없이 기다리는 존재 같았다.


살아온 세월과 살아갈 시간을 재어보면 미래가 더 짧은 삶을 사는 사람.

그런 마음이 들 때면 친가의 할아버지와 외가의 할머니께 잘해야지 하는 생각에 반성을 하게 된다.


설날 연휴가 지나고 며칠이 지나고

'시집갈 때 써라, 내가 죽으면 이 돈을 직접 못주니까 미리 준다.' 고 외할머니가 말씀하셨다고

외삼촌이 대신  계좌번호로 50 원을 이체시켜주었다.




고된 농사일로 자식들을 장성시키고 본인의 노후를 사는 외할머니는

본인의 노령연금을 모아서 아직 결혼을 안 한 손자 손녀에게 미리 보내주셨는데

큰돈이 아니지만 이 돈을 미리 주신다는 그 마음이 왜 그리 애달픈지.


어릴 때 아빠를 여읜 후 인간은 누구나 삶과 죽음의 경계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이별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일임이 분명하다.




생애 처음으로 통장에 할머니의 이름이 찍힌 돈을 받고 나서 하루 종일 마음이 먹먹했다.


'할머니.. 이 돈을 어떻게 써야 가장 뜻깊게 쓰는 건지 모르겠어요.

언젠가 제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날, 빛나는 날에 할머니 생각하면서 쓸게요.'


여행 일을 하느라 한국을 떠나 먼 곳에 있는 동안

항상 가족들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할까  마음을 졸이며 살았던 시간들이 새삼 생각난다.

나이가 들수록 곁에 있는 사람들과 더 오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한다.


외할머니의 바람대로 여행을 다니지 않고 한 곳에 사는 손녀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의 바람은 외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마지막 길은 꼭 함께, 지켜드리고 싶다는 것.


오랜만에 나의 뿌리와 역사를 느끼고 온 이번 설날.

외할머니,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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