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길에서 만나는 것들 1

지도 보는 법

by 꿈꾸는 연어

저는 사람을 참 좋아합니다. 거기에 어울리지 않게 겁이 많았습니다.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겁이 많아서 혼자일 땐 주로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삶에도 지도가 있으면 더 좋을까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떠오를 때마다 서둘러 잠을 청하고는 했는데 그런 것들은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기억해야 할 것들을 잃었습니다. 소중한 기억들을 지키고 싶었던 저는 굳은 결심으로 차라리 과거를 하나도 잊지 말자고 스스로를 괴롭혔습니다. 그렇게 기억에 매달리면 어두운 것들이 더 힘이 강해집니다.


과거를 잊으면 비슷한 사건들이 재연됩니다. 과거에 매달려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그러니 과거와의 관계를 정리해야만 했습니다. 과거는 기억하고 싶은 역사가 되었을 때, 과거를 지나온 지금의 나, 오늘의 내가 있었습니다.


작년 3월 제주도 여행은 즉흥적으로 예약한 출발 티켓과 함께 갑자기 진행되었고, 그만큼 돌발상황이 많았습니다. 공항 근처에서 하루를 머물고 다음날 서귀포로 가서, 거기서부터 한 바퀴를 돌아볼 생각으로 숙소 예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출발 3일 전에 여동생이 금요일 오후 반차를 내고 오겠다고 하면서 서귀포에서 하루를 머물고 다시 제주 시내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자매의 첫 여행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일정을 조정해 동생에게 맞추려 했던 것입니다. 그중에 가장 인상 깊은 한 장면이 있습니다.

여행의 시작


부푼 기대로 렌트를 염두에 두고 트렁크에 짐을 챙겨서 떠난 여행이었으나 면허증을 빠뜨렸다는 걸 뒤늦게 알았습니다. 차로 이동할 생각에 숙소는 한라산 주변 조용한 곳으로 2박 또는 3박씩 나누어 예약이 끝난 상태였는데 말이죠. 잠시 공항파출소 앞에서 고민하다가 이미 업무시간이 끝난 걸 알고는 공항 밖으로 나왔습니다.

임시면허증이나 집에 연락해서 면허증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굳이 그럴 필요를 못 느꼈고, 지도를 보니 대중교통으로 이동이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제주도에서 서귀포로 이동 거리가 좀 되는 편이었지만, 트렁크를 끌고 다니며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도착한 다음날 아침부터 비가 내렸고, 버스를 타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숙소 앞에 정류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귀포로 가는 버스 안에서 산길을 굽이굽이 도느라 멀미 때문에 눈물이 줄줄 흘렀고, 올레시장까지 한 시간 반쯤 걸렸던 것 같은데 도착했을 땐 모든 의욕이 사라졌습니다. 빗줄기는 더 굻어지고 숙소까지 걸어가는 동안 걱정은 내일 다시 같은 버스를 타야 한다는 사실이었죠.


걱정이 무색하게 다음날, 비가 쏟아진 뒤 하늘은 더 파랗게 맑았습니다. 어제의 멀미를 피하기 위해 환승하는 노선도 찾았습니다.

그렇게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사진에 보이는 길까지는 괜찮았는데) 물웅덩이가 나왔습니다. 나중에 보니 정류장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더 넓은 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려서는 곧장 앞에 보이던 좁은 길로 들어갔기 때문에 조금만 더 가면 나왔을 넓은 길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던 거죠.


처음 만난 물 웅덩이는 작아서 지날만했는데, 갈수록 점점 넓은 웅덩이가 나오더니 급기야 무릎까지 오는 깊이였을 땐 막막했습니다.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방법을 찾아야 했던 탓에 트렁크를 들어 올려 고생을 사서 했습니다. 길 가에 있는 나무와 웅덩이와 사이로 곡예를 해 나갔습니다.


동생이 렌트를 해서 주말을 보내고, 자매 여행 끝에는 올레시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올레시장에서부터 드디어 여행의 설렘을 느끼며 한라산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이 여행이 남긴 것


여행 계획을 세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겠죠. 혼자서 여행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이전에는 주변에 계획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여행을 준비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지도로 본 소요 시간(왼쪽은 자동차, 오른쪽은 도보)

자동차로 11분 거리가 도보로 2시간이 넘는다니 선뜻 믿어지지 않아서 걸어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지도를 확대해서 봤기 때문에 도로가 좁다는 걸 생각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인도가 없는 길이었고, 역시나 좁은 길은 순탄할 수 없는가 봅니다.


숙소에 도착한 뒤에는 가볍게 산책을 나가고 싶어 이번에는 지도를 축소해서 봤습니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편의점이라도 다녀올 생각으로 지름길을 찾아 가볍게 걸어 내려갔지요.


처음엔 길이 너무 좁고 볼 게 없었는데 조금 더 내려갔더니 시야가 확 트이고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길이 넓어진 건 아니었는데, 그저 시야를 막고 있던 큰 나무들과 농장 주변의 울타리 같은 것들이 사라지고 없었던 거죠.

좁은 길에서 만나는 것들, 혹은 시야가 좁아서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땐 주변 소리에 예민하게 됩니다. 주변에 볼 것이 없으니 앞만 보면서 빨리 걸을 수도 있었고. 그런데 앞이 트인 뒤에는 경계심이 풀어지면서 기분이 가벼웠습니다.


문득 한 길을 고집하느라 주변에 울타리를 세우고 있었던 건 아닌지, 제가 살아온 과정이 좁은 길 같았습니다.

인생에도 지도가 필요할까요? 저는 지도를 보는 것만 할 줄 알았지, 잘 보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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