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 치유, 평범함, 그리고..

따라서 지난 6년은 결코 방황이 아니었다

by 김상혁



나는 말야. 유럽을 자전거로 여행하고 싶은 꿈이 있어. 노르웨이에 가서는 출퇴근을 수영으로 왔다갔다 해보고 싶기도 하고.

올 겨울에는 노르웨이에 다녀오고 싶고. 그 다음에는 네팔도 다녀오고 싶고. 조지아도 다녀오고 싶어. 여행해보고 싶은데가 무척 많아.


혼자 여행하는 것도 정말 좋아했는데. 제주도 혼자 다녀오기. 전국 혼자 자전거 타고 돌기. 그냥 바로 속초 가서 고성까지 무작정 걷기 등등.


꽤 나는 그런 모험을 할 때마다 즐겁고 행복했는데 말이야.


기타를 치는 걸 배워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하며 노래부르는 나의 모습을 종종 상상하곤 해.

온갖 세계의 요리들을 다 배워서 직접 요리해보고 싶기도 하고.

유도, 태권도, 클라이밍, 수영 등 다양한 운동을 배워보고 싶기도 해.



최근 나는 조금 무기력했다. 무기력이라는 표현보다는 나의 삶이 잠시 정지된 기분이었다. 이번 주 월요일에 아파서 하루 종일 누워서 쉬었고. 원래 열심히 '소명의식'같은 걸 가지고 스페인어 배우려고, 영어로 유투브 컨텐츠 만드려고 열심히 하루하루 살았는데. 지난주부터 '내가 정말 원하는 걸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에 영상을 만들기 시작한 후로부터. 아 삶이라는 것이 꼭 그날 그날 해야 하는 일을 한다고 만족스러운 게 아니라, 정말 내가 원하는 걸 두려움을 무릎 쓰고라도 해내면 그 자체로 만족스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묵묵하게 해나갔던 것들에 대한 의욕이 잠깐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고 표현한 것은 그것을 그냥 버려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 표현이다. 그리고 이번 주 수요일날 친구가 놀러와 금요일까지 그냥 친구랑 같이 지내는 것에 최대한 집중하며 보냈다.


무기력보다는,

삶이 정지된 기분 보다는,

그냥 쉬었다고 하자.

그냥 잠시 멈추는 걸 정말 어려워하는데. 이제 그만 어려워하자. '살면서 언제든지 내가 원할 때 쉴 수 있음'을 나의 삶의 앎에 추가하자. 그게 사실이니까.


난 지금 점 위에 서있다. 드디어 내가 하고싶은 것을 하루하루 해나가겠다고 다짐한 상태다. 드디어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산다고 해서 그것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앎을 획득했다고 느낀다. 하지만 여전히 막막하다. 하고싶은 것을 하루하루 해내겠다고 다짐하니, 꼭 마치 그 하고싶은 것은 나의 생계를 해결해줄, 나의 삶을 모두 한꺼번에 평탄하게 해줄 무언가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영상에 또 집착한다. 그냥 해보고 시도하는 것에 만족해야하는데 엄청 힘을 줘서 잘하려고만 한다. 아직 나는 위태위태한 것이다. 해야하는 걸 하고, 저절로 되는 걸 해야하는 세계에서는 어느정도의 여유와 평온함을 획득했지만. 하고싶은 걸 하는 세계에서 나는 아직 어쩔줄 몰라한다. 어쩔줄 몰라하고 나의 시야는 너무 좁고 좁다. 마음가는대로 하는 것의 선택지가 영상 만드는 것 하나밖에 없다. 그것말고도 나는 여행도 갈 수 있고. 기타도 칠 수 있고. 운동도 배울 수 있고. 내가 그냥 공부하고싶은 것을 공부해볼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영상 만드는 것에 집착할 수밖에. 그 하나에 '내가 살고싶은 삶'이 전부 걸려있으니까.

당연한거다. 바보.


*


대학교 1학년부터 약 25살까지 나는 그래도 내가 하고싶은 것을 막 해보려고 애를 썼었다. 자전거 전국일주, 학번대표, 학생회 활동, 인력거 아르바이트, 테드 강연, 생일 다짐 이벤트, 북한산 겨울 입수, 조정부 활동, 인도네팔여행, 산티아고 순례길, 춘천에서 혼자 살기 등등... 내가 그 삶을 어느순간부터 접은 이유는 저 모든 것들이 내가 진짜 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함같아서였다. 내가 내 삶을 진솔하게 살기 위해서보다는 내가 남들에게 그럴싸한 스토리를 전하고 싶어서 계속 그러한 경험들을 쌓는다고 느꼈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이 '상혁이 너는 정말 하고싶은 걸 하면서 사는 것 같아'라고 말해도 난 속으로는 그 말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그래도 종종 저 때의 나 자신을 그리워한다. 생생했던 나. 활기가 있었던 나.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나. 하지만 그 때는 나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그것을 지속시키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의 기대를 다룰 줄 몰랐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해야하는지 몰랐고, 삶을 안정되고 평온하게 만드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저런 것들을 하면서 늘 '이런 삶이 과연 평생 갈 수 있을까? 그러고싶은데. 그러지 못할까봐 너무 불안하다'라는 마음을 안고 늘 전전긍긍 그 삶을 계속하려는 노력을 최선을 다해서, 하지만 그 최선이 결코 좋은 해법이 아닌, 에너지가 줄줄 새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 나는 그냥 그 에너지를 아예 버려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6년이 지났다. 6년 간을 나는 갈등을 해결하며 살았다고 생각한다. 좋게 말하면 치유를 하며 살았다고 생각한다. 결코 내 주위의 누군가가 '너는 그 동안 방황했어'라고 말하게 냅두지 않을 것이다. 혹은 '이제야 좀 정상적으로 행복하게 살기 시작했네'라고 말하게 냅두지 않을 것이다. 이런 자신감을 갖는 이유는, 돌이켜 생각하기에 내 20대 초반의 '하고싶은 것을 하는' 삶들은 인생에서 최종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삶의 층위인 것 같아서다. 그리고 6년간의 갈등해결, 치유의 기간 동안 나는 그 최종적 삶의 층위 밑의 세 종류의 층위를 쌓았다고 생각한다. 가장 밑에는 평범함의 층위, 그 위에는 치유의 층위, 또 그 위에는 소명의 층위다. 그리고 그 세 종류의 층위는, 나를 앞으로 평생동안 하고싶은 것을 할 수 있게 무한한 동력을 제공할 것이라 굳게 믿는다.


가장 먼저 쌓인 층위는 '하고싶은 것들을 하는' 층위 바로 밑에 있는 소명의 층위다. 나의 소명은 가르치는 것이고. 그 분야는 언어다. 나는 한자선생님이 될 수도 있고. 영어와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교재를 만들 수도 있고. 지금 하는 언어 유투브를 통해 무의식을 활용한 언어습득 방법을 꾸준히 공유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나는 스페인어도 배울거고. 노르웨이어도 배울거고. 네팔어도 배울거고. 조지아어도 배울 거고. 일본어도 배울거고. 중국어도 배울거고. 계속 끊임없이 평생 언어를 배울거다. 소리를 통해서도 배울거고. 에이아이를 활용해 시각적인 보조를 받아서도 배울거다. 그러한 배움의 과정들을 새로운 언어학습자들과 끊임없이 나눌 것이다. 언어를 배우는게 어려워 언어를 포기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그래서 나는 아무리 무기력해도 언어는 배운다. 어딜 가든 나이가 몇 살이든 언어를 계속해서 내 방식대로 배울 것이다. 그 과정에서 대학원에서 언어를 배울 수도 있고. 어떤 사업에 참여할 수도 있고. 어떤 방식으로든 내 소명은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소명은 내 삶을 계속해서 발전하게 만든다. 내 삶을 가치있고 타인에게 이롭게 만든다.


그 다음에 바로 밑에 쌓인 층위는 '치유의 층위'다. 나는 그 6년동안 늘 '다른 사람을 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사실 ‘나를 살리고 싶다’란 생각과 별 다를게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 노력의 과정은 나를 살려, 지금 내가 이렇게 하고싶은대로 살 용기를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주변 친구들에겐, 남들에겐 참 쉽고 편하게 '하고싶은 걸 하라며' 격려하고 응원해놓고. 나를 위해 그 마음 내는 것은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 치유의 층위를 쌓기 위해 나는 상담을 받았고. 다양한 심리학 서적들을 읽었으며, 각종 철학적, 종교적, 사회학적 고민들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얻은 가장 값진 것은 글쓰기다. 나는 사람을 살리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쓰는 글은 그런 '사람을 살리는 글'에 조금은 더 가까워 졌다고 생각한다. 예전의 나는 주먹구구식 조언, 막연한 긍정적 사고를 강요하는 것, 혹은 강박적인 노력을 강조하는 것 외의 글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주 글을 함께 나누며 삶을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좋은 글방 동료들도 얻었다. 글쓰기를 통해 나의 치유의 층위는 계속해서 자극받고 강해질 것이다. 다만, 치유의 층위는 이러한 '사고'측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을 잘 써보는 것' 그리고 '좋은 사람과의 인간관계를 존중과 평등 속에 맺어보는 것' 등에서도 적극적으로 이뤄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아래에 쌓인 층위가 '평범함의 층위'이다. 역설적이다. '평범하게 살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비로소 '하고싶은 대로 사는 나의 삶'을 살기로 결심할 용기를 내기가 더 쉬워지는 것 같다. 평범하게 산 우리 엄마 아빠를 존경하기 시작하면, 비로소 그러한 위대한 평범한 삶을 살아내며 나를 사랑으로 키운 우리 엄마 아빠의 사랑에 보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나의 인생을 가장 빛나게 사는 것임을 자각한다. 평범한 하루하루의 일상 속에서 평온함을 맛볼 수 있게 되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는 것을 소중히 여기면 여길수록, 내 삶은 타인에 덜 의존적으로 변하게 되며 내가 내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안정감을 획득한다. 바깥에 핀 꽃 향기를 시간을 내어 맡는 것. 노을 진 하늘을 여유를 내어 보러 나갈 수 있는 것. 주변 이들의 기쁜 일들에 기꺼이 시간과 마음을 내어 함께 기뻐하는 것. 타인에게 주고 타인으로부터 받는 것이 구분되지 않는, 늘 일상 곳곳에 숨어있는 긍정적인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모두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삶의 역량이 이 때 생긴다.


따라서 지난 6년은 결코 방황이 아니었다. 6년이라는 시간이 없이 그냥 곧장 하고싶은 것을 하는 삶을 불안정하게 살기 시작했다면, 오히려 더 삐걱댔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이 시기에 와서도 아직 정말 중요한 인생의 층위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내가 머물고 있는 삶 속에서만 허우적대고 있었을지도. 하지만 정말로 그 6년 이란 시간이 방황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는 내 삶이 보다 탄탄하고 평온하다고 느끼는 지금, 정말로, 즉시, 곧바로 하고싶은 것을 하루하루 하는 용기를 내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더 이상. 내가 유도를 배우면서 , 기타를 배우면서 '이런거 배워서 뭐해'따위의 말을 절대 해선 안된다. 더 이상 내가 여행하고 싶은 곳이 있을 때 '저런 곳 가봤자 다 똑같아'라는 말을 해선 안된다. 더 이상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실용성의 기준으로 재단해선 안되고, 더 이상 나이가 들 수록 내 삶이 고정되어간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진짜 안된다고. 왜냐하면 나는 당장이라도 내일 시간을 내서 어디 멀리 떠날 수 있으니까. 그게 사실이니까. 그게 정말로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 중 하나니까. 사실이 아닌 믿음으로 내 안에서 피어나는 소원의 에너지를 억눌러선 안되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낸 그 아래의 층위들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면서, 그로부터 얻은 힘을 말미암아 하고싶은 것을 기꺼이 해나가는 삶을 사는 것. 당연히 내 꿈을 좇는 것도 여기에 포함이다. 영화감독이 되는 것. 내 영화를 만들어보는 것. 세계여행을 하는 것. 세계여행 유투버가 되어보는 것. 그것이 불가능한 꿈이라고 결코 단언하지 말자! 그 꿈들은 모두 가능하다. 그 꿈들을 현실로 이뤄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냥 내가 안하기로 선택한 것이 되어야 하겠다. 결코 아직 원하는 꿈들을 그냥 포기해버리지 말자. 내 삶이 언제든지 '더' 좋아질 수 있음을 늘 믿자.



KakaoTalk_Photo_2025-08-16-09-06-23.jpeg 집 앞에 심은 깻잎 24/08/14


keyword
작가의 이전글뿌리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