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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혁 Sep 27. 2024

대세에 지장없다

부모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했다는걸 거짓말이라 생각하는 입장에서

대세에 지장없다 라는 말을 요즘 좋아한다. 이 말은 아주 동양적인 지혜가 담긴 문장이다. 예를 들어 내가 부모님에게 이 나이 먹도록 가끔 용돈을 받는다고 해보자. 지혜가 없는 나는 그 사실이 나를 성인으로서 독립적이지 못하고 무책임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주는 용돈에 고마운줄 모른다. 마음의 부담이 더 크기때문이다. 그런데 지혜가 있는 나는, 지금까지 받아온 것에 비하면 지금 좀 받는 것은 대세에 큰 지장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럼 그냥 고맙게 받으면 된다. 고마움으로 말미암은 행복으로 내 삶을 부담없이 잘 살아, 갚고 싶으면 갚으면 된다. 더 나아가서. 갚을 수 있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해준 것을 자식이 갚을 수 없는가? 대세에 따르면 불가능하다. 이미 부모는 나를 낳으시고 기르신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부모가 준만큼 똑같이 갚는 건 불가능하다. 그 대세적 사실을 먼저 수용한 후. 평생 지속될 이 부모간의 주고받음의 관계. 혹은 대세적으로는 자식이 부모에게 받는 관계를 어떻게 꾸려나갈까 고민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그래서 나는 성인의 부모로부터의 심리적 독립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아직 심리적으로 독립되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는 서양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서양도, 프로이트(잘 알고 하는 이야기는 아님) 같은 사람들도 사람의 심리를 분석하는데 '어머니' '아버지' 를 자주 활용한다. 그 컴플렉스와 심리적 기제들은 그 양상과 정도만 다를 뿐 인생 전체를 좌우한다. 나는 서양에서 말하는 대부분의 성인의 심리적 독립이, 많은 대체물들을 끼고 일어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종교가 될 수도 있고. '하느님 아버지...'. 혹은 그게 성취지향, 물질지향적인 삶의 방식이 될 수도 있다. 혹은 지나친 정상적 가족, 삶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동양은 차라리 부모에게 평생 효도하라고 말한다. 어차피 심리적으로 해방되지 못할 것, 끊임없이 계속 반응하는게 인생의 행복에 더 이롭다는 말이다. 자유를 표방하는 미국사회의 교육과 사회의 모습을 보면 동양의 정답이 더 일리가 있어보이기도 한다.



하여간. 대세에 지장없다는 말은 내게 많은 위안이 되어서 좋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이롭다. 왜냐면 우리 세대가 개인으로 살아가면서 맞서는 것들이 주로 이 '대세'이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들은 평생 죽을 때 까지 '부모님에게 미안해해야하고 효도해야하고. 자식은 자식된 도리가 있고'라는 대세에서 심리적으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평생의 부모와의 관계가 그랬기 때문이다. 그걸 벗어나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때로는 폭력이기도 하다. 어줍잖게 그걸 시도하는 많은 부모들이 나이가 들어서 '빈둥지 증후군' 그러니까 자식의 빈자리를 스스로 채우지 못해 우울해하거나, 다른 대체존재를 찾기도 하는걸 나는 봐왔다. 어떻게 보면 내가 광천에서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도, 심리학적으로는 여기 어른들의 '빈둥지 증후군' 에 내가 기생하고 있다는 생각도 가끔 한다. 나는 그냥 '대세'에 맡겨버린다. 당신들이 그런 빈자리가 있다면. 내가 기꺼이 그 빈자리를 채우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당신들이 주는 것에 나는 모두 감사히 받을 거라고.




예시를 너무 오래 끌었다. 대세에 지장없다는 말은 부모자식 관계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윤리를 개인으로서 고려해야할 때도 유용하다. 내가 남들은 하지 않는 반성과 고민으로 너무 쓸 데없는 시간을 끌고 있을 때. 잠시 돌아보는 것이다. 너 이렇게 파고든다고 저 사람들 죽일듯이 비난할거야? 아니잖아. 내가 나만을 대상으로 비판하고 비난하고 쪼글어들어 있을 때, 그냥 대세를 생각한다. 내가 이런다고 세상이 달라지나? 내가 이런다고 주위 사람이 행복해지나? 대세에서 내가 빠져있을 때 내 주위 사람들은 더 불행해진다. 제대로 된 환경적 도달점을 찾지 못할 땐 나 또한  불행해진다. 



보통 사람들은 대세를 생각하면 또 비교에 빠져들고. 거기서 자기 자신을 또 억압하지만. 대세는 그보다는 자기 위로에 활용하는 편이 좋다. 실은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그렇게 대세를 자기 학대에 활용한다. 하지만 그냥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어떻게 살아가긴 한다. 그런 사람이 수만 수십만이다. 나만 이런게 아니다. 나만 부모님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는게 아니다. 나만 이런 저런 차별 속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내가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다 비난하고 탓할거야? 아니잖아. 그럼 나 자신에게도 그러지 말아야지. 거기서 대세를 활용하는 것을 그친다. 



그러나 대세에 의지하기 이전에 내가 빠져들고자 하는 깊이는 나에게 고스란히 남는다. 그것을 적절하게 긍정하고 적절하게 유지해서 견뎌내면 나에게 새로운 삶이 열릴 수도 있다. 새로운 관계. 새로운 환경에 내가 돌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 깊이는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애매하게 대세에서도 벗어나고 그렇다고 새로운 환경으로 갈만큼 깊지도 않다면. 그것은 맹장 꼬랭지처럼 쓸모없이 너덜너덜하게 달라붙어있는 무엇에 불과하다. 혹은. 그 쓸모없이 너덜너덜하게 달라붙어있는 무엇이.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표징일 수도 있다. 생각의 깊이만큼 존재는 표현된다. 대세에서 인정받진 못하지만. 언제나 내가 홀로 떨어져버릴 수 있는 나의 사유의 가능성이야 말로 내 존재의 성장의 유일한 경로일 수 있다. 





+

글을 쓰다보니 '대세'라는 표현이 명확하지 못했던 것 같다. 

원래는 어떤 대세를 내가 선택할 것이냐의 문제도 포함되어있는 단어였는데..

그냥 하나의 유일한 대세가 존재하는 것처럼 표현이 되었다. 

내가 아직 어느 하나의 대세 이외의 대세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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