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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혁 Sep 23. 2024

꿈을 위해 '죽어버리자'고 살아보니

마음 이야기 

9월 초에, 대학원 준비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만둔 이유를 말하자면 가장 큰 계기는 등록금에 대한 부담이었다. 예전의 나같으면 '등록금 때문에 내가 부담을 느끼네. 그럼 나는 돈때문에 내가 정말 하고싶은 걸 못한다고 느끼는구나. 그럼 더 이 상황을 극복하려고 해야겠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건 정말 내 삶의 선택의 이슈를 돈문제에서 멈춰버렸던 것 같다. 더 생각을 할 수가 있었다. 어, 내가 진짜 여기 스페인어 대학원에 가고 싶은거면 등록금에 대한 부담이 생기더라도 그걸 마련할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을텐데. 내가 그러고 있지를 않네? 어, 내가 진짜 가고싶어서 지금 준비하는거면 꼭 지금 안가더라도 금전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간다고 생각하면 될텐데, 그게 아니라 나는 무슨 지금 안가면 큰일 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네? 



어, 나 스페인어 대학원 가서 결국 뭐하려고 하는거지? 너 공부 진짜로 하고 싶어? 일단 현재 오늘의 너의 삶은 행복해? 너 이 대학원을 갔을 때 정말 그 이후의 너의 삶이 선명하게 보여? 줄줄이 따라온 질문들에 대답은 모두 no였다. 뭐가 마땅한게 없었다. 그냥 줄줄이 그 질문에 대답을 선명하게 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 애매모호한 상태를 메꾸기 위한 합리화가 잔뜩이었다. 그래서 그게 졸라짜증나고 갑자기 환멸감이 확 와버렸다. 와. 이제 이거 못버티겠다. 나 왜 이렇게 계속 합리화하면서 사는거냐. 안되겠다. 






그러고 세계여행을 가기로 결심했을 때, 나는 더 나락으로 떨어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야 내가 균열을 내다가 지쳐서 다시 튕겨오르지 않고, 똑똑똑똑 깨다가 진짜 깨버려서 그 다음 스테이지로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내려가기로 마음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그 때 읽었던 책이 순례자. 그 책을 한 번읽고, 또 두번 읽었는데. 사실 그 이전에도 한 세 번은 봤던 책이다. 처음 읽었을 때 가장 안와닿았던 부분이 '죽음'이라는 챕터였다. 나는 정말 죽음과 친구인가? 에 대해서 내 대답은 너무 명확한 '아니오'였다. 나는 내일 죽을 것 같이 생각해보면서 그랬을 때 오늘 최선을 선택하는 삶이 아니라. 한 3년 후, 10년 후, 20년 후에 죽을거라 가정하고. 그 최선을 곳곳의 시간대에 두루두루 퍼트려 배치하는 짓을 하고 있었더라. 그래서 나락으로 떨어지기로 마음 먹었을 때, 나는 더 힘을 주기로 했다. 죽을 작정을 하고 내려가자. 그래야 내가 합리화 한 많은 것들이 부숴지겠다. 



다행히도 마침 내가 '죽었다'고, 혹은 '망했다'고 생각하는 노동을 일찍 할 수 있었고. 그 곳에서도 평온이 있음을 자각하면서 '그냥 죽어버려야지' 하는 마음가짐의 긍정은 조금 더 쉬웠던 것 같다. 내 삶이 3층에서 멈춰버린 삶이라면, 그 2d 게임기에서 밑에 모래를 파가지고 드디어 2층의 한 칸 모래를 깨고 '오 여기도 살만하네'를 느꼈는데. 그냥 그정도만 느끼면 다시 당연한 습관처럼 모래는 채워져서 3층으로 돌아올 것 같았기 때문에. 미친듯이 더 모래를 파듯이. '죽어버리자' '내일 죽어야지' '망하자 망해버려' 하는 생각을 계속 했다. 



이랬을 때 내 삶이 더 나아갔다면 모르겠는데. 그러는 와중에 연휴가 껴버렸다. '죽어버리자' 모드로 살면서 들어올려진 것은 '나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수치심이었다. 모양은 다양하지. 그게 부모님에 대한 것, 엄마에 대한 것, 아빠에 대한 것, 여성에 대한 것, 사회에 대한 것, 등등등등. 난 꽉 붙들었다. 그래도, 10대때 나를 무한히 사랑해보자고. 너 맨날 10대 때 너의 모습이 조금만 맨살을 드러내도 걔를 막 혼내고, 할퀴고, 욕하고 그랬잖아. 이제는 걔가 나올 때 더 북돋아주고. 더 막 사랑을 아낌없이 듬뿍 줘보자고. 그럴수록 나를 감싼 것은 죄책감, 죄책감보다도 어떤 수치심이었다. 어. 이런 나의 모습 별로다. 어 이런 나의 모습을 누가 좋아해준다고. 어 이런 나의 모습으로 계속 살면 나 진짜 망할 것 같은데? 이 생각을 나는 계속 그냥 반박하거나, 무시하거나 하는 식으로 버텼다. 



그렇게 '죽어버리자'모드로 살면서. 삶은 꽤 원초적이 되어갔던 것 같다. 어차피 내일 죽을거면. 어차피 죽을 것처럼 살거면. 내가 10년, 20년을 내다보고 하는 꾸준한 노력은 그 모드에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던게 보이지 않는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때 언어를 공부하기를 더뎌했고. 내가 잘하고 싶은 분야에 대한 아예 부정이랄까? 그런 식으로 의도적 외면을 내가 시행한 것 같았다.



마음은 참 신기해. 그랬더니 온갖 꿈들이 내게 올라왔다. 일상과 하루에 '어차피 내일 죽는데' 모드로 극단적으로 살면서 하루하루 성장하고자 노력하고 발전하려고 하는 것을 없애려고 하니까. 내가 진짜 발전하길 원하는 '결과값' 다른 말로는 꿈들이 내게 막 떠오르더라. 3d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작가, 감독이 되는 것도 그 중 하나였고. 심리학의 대가가 되는 것. 그동안 '언어학'이라는 거대한 합리화가 가리고 있던 내 더 생생한 꿈들이 내게 불쑥 불쑥 찾아왔다. 하지만 그 꿈들의 결론들도 내가 생각하는 지금의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으므로. 계속 무게중심을 잡아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정신차리지 않으면 죽으려다가 죽을 힘을 다해 사는 또 다른 삶으로 미끄러질 수도 있는 처지였다. 죽을 힘을 다해 살고싶진 않다. 죽을 힘을 다해 살고싶을거면, 그게 오늘의 나의 느낌에 기반한 선택이길 바란다. 근데 그렇게 불쑥 불쑥 찾아온 꿈들에 나의 삶을 투신하는건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너무 나의 오늘이 불투명했다. 



그럴때일 수록 세계여행, 그리고 글쓰기를 붙잡았다. 신기하다. 글쓰기를 잘해서 '작가'가 되고 싶단 마음은 하나도 안생기더라. 근데 하루하루 내가 계속 어떤 죄책감과 어떤 수치심에도 할 수 있는건 글쓰기였다. 무슨 이렇게 글을 매일매일 써. 좀 적당히 해. 내면에 이런 목소리도 생길 정도로. 글쓰기는 내게 근사한 무언가가 아니라, 부끄러운 무언가였다. 하지만 나의 오늘을 살게하는 것. 나는 글을 쓰면서 오늘의 나를 계속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게 만들었고. 그런 글쓰기에서의 내면에 대한 탐구가 심리학으로 이어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세계여행도. 온갖 회의와 의심들. 니가 세계여행을 가면 과연 행복할까? 에서부터. 세계 여행을 가느니 빨리 심리학 대학원에 가버려~ 심리학 공부하고 싶잖아. 세계여행 가면 애니메이션 만드는거 공부나 할 수 있겠어? 이런 생각들. 굉장히 매력적이지만 실은 나의 오늘과 꿈을 죽이는 생각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내가 세계여행을 가기로 마음먹었고,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지금의 일렁이는 생각들이 모두 떠올랐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 근원을 잊으면 안됐다. 생각은 그 근원에 걸쳐있는 것에 불과하다. 



3주의 법칙이 맞는 것 같다. 어느 삶이든 3주가 되면 적응이된다고. 쌈채소 하우스에서 살 때도 3주가 지나기 전에는 온갖 의무감과 의심, 죄책감, 수치심들이 나를 미친놈처럼 노력하게 만들었었는데. 3주가 지나니까 마음의 평온함이 생기면서 노을지는 햇빛을 누릴 수 있게 되었거든. 지금도 그런 것같다. 내가 너무 익숙한 판형을 부수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3주가 지나기 전에는 내 기존의 삶이 다 무너져버리기도, 그 이후의 삶이 휘몰아치기도, 그리고 현재의 삶이 내적으로 너무나도 치열하기도 하다. 하지만 3주가 지나면. 다시 이게 정리가 된다. 아, 내가 이런다고 죽는건 아니구나? 아, 내가 죽을 각오로 버틴게 이 삶이 아니라, 이 삶이 내 안에 안착되는 과정이었구나? 그러니 다시 내 안에 묻어져있던 잘하고 싶었던게 드러난다. 영상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일. 그리고 그게 어떻게 묻어졌는지에 대한 과정도 드러난다. 영상을 만들자고 채널을 만들었다가, 영어공부를 하고서부터 몇 년을 돌아왔구나. 



버틸 수가 없었거든. 내가 선택한 삶을 밀고나가기로 결심했을 때 나에게 휘몰아쳐오는 죄책감과 수치심들에 나는 늘 털썩 털썩 무너지고 넘어졌으니까. 근데 그걸 난 벌써 2번이나 버텨낸거구나. 이번에는 오히려 즐겼다. 내가 싫어하던 나를 내가 좋아하는 과정. 타인이 아무리 나를 안좋게 보더라도 나는 그것보다 더 크게 나를 좋게 봐주겠다는 마음쓰는 과정을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나는 이상을 꿈꾸는 나를 늘 믿으며 살았고. 지금은 그 이상이 점점 (원래는 이상에 쉽게 무너졌었던) '나'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이상을 꿈꾸는게 존재의 역량을 높인다면, '나'와 함께 꿈꾸는 이상은 끝도 모르게 내 존재의 힘을 키워줄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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