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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혁 Sep 28. 2024

같이 공부합시다 그러면

조금 불편했던 이웃생활을 더 긍정하기 시작했다.

나를 밥먹으라 오라고 불러주는 이웃이 있다. 내가 지금까지 이 이웃집에 가서 밥을 먹는 이유는 그 이웃 선생님들(70대 초반이시다)이 부담을 주지 않는 방법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일단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렇게 와서 밥 먹는거 절대 부담느끼지 말라고 내게 말해준다. 우리도 그냥 너가 너무 착해서 좋아서주는거니까 절대 부담느끼지마.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래도 일방적으로 계속 주면서 부담을 안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래서 그분들은 내게 종종 막걸리나 소주, 맥주 심부름을 시키신다. 때로는 술 값을 챙겨주시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내 돈으로 알아서 사가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날은 특히 맛있는걸 먹었거나, 혹은 집에 있는 더 특별한 먹을 것을 같이 먹었을 때, 나에게 '야 저기 청소기로 한 번 좀 밀어라' '저기 식물들 물 좀 줘라'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잔일을 시키신다. 내가 느낄 미안함을 상쇄시킬만한 움직임을 나에게서 가져가는 것이다. 나도 역으로 그걸 이용해서, 약간 좀 부담이 느껴질 정도로 식물에 물주는 일이나 청소하는 일을 시킬 때가 있으면. 냉장고에 가서 우유같은 것들을 파먹는다. 그럼 오히려 더 먹으라고 부추긴다. 나도 집에서 자라나는 상추나 깻잎, 엄마가 준 김치, 명절 때 생긴 선물셋트 같은 것이 생기면 곧장 그 집으로 가져간다. 주면서 부담을 주지 않는 사람들의 큰 특징은, 주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더 중요하게는 받는 것에도 개의치 않는다. 자기 존재의 장벽이 높지 않은 사람들이다.



최근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몇 달동안 일감이 없으셨던 아저씨 선생님께서 이제 일자리를 구하신 것이다. 위에서 상술한 그 이웃분들의 특징은 보통의 성격과 머리로 나오는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감히 나는 말하건데, 저런 종류의 고도의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사회성을 가졌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지능이 높은 것과 관련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그런 것을 배울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거나, 혹은 그만한 일들을 살면서 겪었거나. 문제는, 그게 나 때문인지 몰라도 내가 이 곳에 오기 시작한 이후로부터 여기 계신 아줌마 선생님께서 마을회관이나 노인센터를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래는 거기 나가서 노래도 불러주고, 시도 읊어주고. 그곳의 마을 노인분들이 좋아할만한 모습들을 보이면서 잘 어울리며 있었는데. 내가 오고나서부터는 술 심부름도 편하게 시킬 수 있겠다 5개월동안 끊었던 술도 다시 드시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악마가 된 기분이다. 나는 심지어 내년이면 6개월동안 여행을 떠날건데. 그리고 내가 이 곳에서 평생 살 보장도 거의 없는데. 내가 너무 신중하지 못하게 그 사람들의 빈자리를 차지했나 하는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마을회관과 노인센터에 아줌마 선생님께서 가지 않는 이유가 있긴 있었다. 맨날 거기 나가면 다른 사람들 흉이나보고 싸우고 쓸 데없는 이야기나 한다고. 자기는 많이 배울대로 배운 사람이고 시도 읊을 줄 알고 아는게 얼마나 많은데. '내가 이런 사람이여' 하면서 그곳의 분위기와 자신은 맞지 않는다고 하신다. 그러니까 그 분의 사회적 생활이 줄어들은게 꼭 내 탓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냥 사람들 사이에서 지칠대로 지친 것이다. 그럼 차라리 집에서 혼자 있으면서 공부를 하시면 될 일 아닌가. 그 아줌마 선생님께서는 원래 우리말 단어 공부를 집에서 종종 하셨다고. 우리말겨루기 라는 티비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 단어들을 맞추는 것을 즐기셨는데. 최근에 그 티비프로그램이 괘씸하게 청소년 전용으로 컨셉을 바꾸면서 그마저도 재미가 없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안그래도 심심해진 하루에, 아저씨 선생님마저 일하러 나가셨으니. 심심해 죽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심심해 죽겠는 순간중에 유일한 낙의 순간은 내가 아침을 먹으러 올 때, 점심에 컵라면을 하나 먹으러 올 때, 그리고 저녁을 먹으러 올 때라고 말하신다.



부담이었다. 실은 내가 뭐 컵라면을 먹고 싶어서 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나도 이 사람들이 밥을 주는게 고마운 마음에 오라는 때 가는 거기도 하고. 나도 사실은 이 곳에서 마땅한 친구가 없기 때문에 이런 관계마저 없으면 정말 하루 종일 혼자인 수가 있기 때문에 나도 나의 사회적 필요에 맞춰서 가기도 한다. 밥도, 실은 내가 돈을 차라리 좀 벌어서 그냥 해먹는게 영양적으로는 더 알맞다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애초에 고기 반찬을 잘 안드실 뿐더러, 꼭 고기반찬을 하시는 날이 있으면 그 집에 있는 '초롱이'라는 강아지에게 고기를 다 주라고 하신다. 아니..나도 고기 먹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이 올라온다. 그래서 그냥 여기서는 '밥을 먹는다'는 일상을 함께 나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해하고. 영양을 챙기는건 내가 따로 요리를 해서라도 스스로 챙겨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근데 더 부담이었던건. 내가 그렇게 그 곳에 먹으러 가지 않으면 아줌마 선생님께서 집에서 심심해 죽을 것 같은게 뻔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말 우울증인진 모르겠지만 우울증이 있었어서 정신과 약을 먹는다고 하셨다. 나는 시골의 대부분의 할머니들이 어느정도의 정신적인 어려움은 당연히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만큼 감내하고 사신 분들이니까. 그래서 차라리 그 약을 먹는게 어쩌면 억지로 내가 원치않는 삶을 강제하며 버티는 것보단 차라리 더 솔직하다는 인상을 갖기도 했다. 여튼 그런 이 아줌마 선생님의 심리적 상황은 내가 계속 여기서 밥을 먹으러 온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게 만들었다. 내가 좋아서 간다는 느낌보다는 내가 가는게 필요할 것 같으니까 가는 느낌.



오늘 아침에 그래서 이야기했다. 오늘은 좀 일찍 집에 가봐야겠다고. 좀 불편하기도 했다. 아니 불렀으면 밥을 미리 취사를 눌러놓으셨어야지. 갔는데 밥 취사를 나보고 누르라 하신 적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만 답답해하기 싫어서 밖에 나가 달리러 나갔는데. '어이? 왜 나가 그냥 좀 있어~' 살짝 가볍게 장난식으로 하시는 말씀이 내 마음 안에 쌓여 무게가 되었었다. 혹은 나도 최선을 다해 내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밥 먹고 적당히 커피 마시고 바로 내 집으로 가고싶은 조바심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아줌마 선생님은 '왜이렇게 급혀? 커피도 마시고 하드도 먹고 좀 느긋하게 있다가 가~' 하신다. 나의 이런 조바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런 상황이 내심 답답했다. 그런데 아줌마 선생님도 마음에 뭔가 눌렸던게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일찍 집에 가봐야겠다고 하니 자기같이 늙은 사람이랑 같이 있기 싫어서 그러느냐고 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신다. 자기는 그냥 아들같아서 그러는거라고. 다행히도 그분의 속얘기가 나에게 꽂히는 식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그래서 나도 이야기 했다. 저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한다고. 젊은 사람인데 열심히 살아야죠. 아침 점심 저녁으로 오는데 느긋하게 있으면 그거 쌓이면 4시간 30분된다고. 그럼 제 시간이 어디 있겠냐고. 저도 마음이 부담돼요~ 아무데도 안나가시니까 제가 올 때만 사람 보시는거잖아요~  그리고 덧붙였다. 아니 운동하러 간다고 하면 그냥 가라고 하면 되지~ 제가 열심히 살려고 하는 걸 막 뭐라고 하면 안돼요~ 활자의 표현들은 싸움같았지만 분위기는 싸움이 아니었다.



결국 대화는 다행히도 '상혁이가 진짜 착혀' 로 끝이 났다. 그렇게 이야기하니 내가 무슨 느낌을 가졌는지 충분히 이해하셨나보다. 그리고 내가 단순히 밥만 얻어먹으러 온게 아니라 나름 그 분의 행복을 생각하고 왔다는 사실도 아신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건 단순하다. 이 분이 내가 갑자기 사라져도 우울하거나 불행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좋은 이웃관계가 더 큰 불행의 시작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설거지를 하고 반찬을 냉장고에 치우다가 말을 했다. '그냥 여기 한 번 제가 공부 하러 와봐야겠네. 선생님도 그럼 그 때 같이 공부하세요.' 시간이 귀한 척 쌩쇼를 했지만 실은 혼자 있을 때 나도 완전히 열심히 공부를 하거나 내 할 일만 했던건 아니기 때문에. 애매하게 상대방을 배려하려고 하지 말고 확실하게 상대방을 이용할 작정을 한 것이다. 마침 옆 집이 곧 이사를 가기 때문에 그 바로 위 옥상에도 사무실이나 공부방을 만들 수 있을 터였다. 오히려 나의 공간이 더 확장되는 것이다. 그럼 차라리 여기서 한 번 공부를 해보자. 그러면서 이 선생님한테도 공부하라고 닥달을 해야겠다. 그래서 내가 떠날 때 쯤이면 혼자여도 그 시간이 아쉬운 시간이 아니게 한 번 같이 노력해봐야겠다. 그렇게 나도 더 적극적으로 떠날 준비를 열심히 할 수 있겠다. 조금 불편했던 이웃생활을 더 긍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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