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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혁 Oct 05. 2024

착하게 살면 굶어 죽을 일은 없다 -1-

가장 착한 사람이 가장 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 2월달부터, 현재 10월까지. 나는 돈 한 푼 벌지 않고 살았다. 가끔 중간중간 단기 알바를 몇 개하긴 했지만.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떻게 살았냐고? 2월달부터 6월달까지는, 홍성의 한 유기농 쌈채소하우스에서 무임금 노동을 하며 밥을 얻어먹고, 있던 돈을 다 축내며 살았다. 그리고 광천으로 이사한 6월부터 10월 현재 까지는, 있던 돈이 정말 다 떨어져 나를 걱정하는 부모님의 도움을 얻기도 했지만, 내가 사는 이 곳 마을 사람들, 교회에 철저히 의지하여 외롭지않고, 굶어죽지 않을 환경을 만들어냈다. 


 

만들어냈다. 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일년 넘게 제대로 돈벌이도 하지 않고 부모님 돈이나 축내고, 주변 이웃들에 기생한 나를 무책임하고 게으르다고 탓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사실 이런 내가 대견스럽다. 왜냐고? 난 그 8개월동안 나의 착한 마음을 최선을 다해 썼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홍성의 유기농쌈채소 하우스에서 일을 하며 지낼 때는, 엄청 많은 고비가 있었다. 서울에서의 삶이 지치고 견디기 싫어 도망가듯 온 그 쌈채소 하우스 마을에서 나는 사실상의 쌈-노예였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쌈을 뜯고, 그 대신에 거기서 주는 밥을 얻어먹고, '유기농' '마을' '청년' 이라는 이름으로 지자체에서 만들어준 여러 좋은 시설들을 사용하며 나의 시골라이프를 누렸다. 점심이 될 때마다 이장님의 사모님이 해주시는 밥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맛있는 한식 뷔페였다. 운이 좋게도 거기에 가끔 치료농장 일을 보러 오는 정신과 의사분에게 달리기를 배워 달리기라는 좋은 습관을 시작할 수도 있었다. 특별히, 그곳에서 내가 쌈을 뜯는 방식의 진화(?)도 엄청났다. 처음에는 열심히 일을 도와야 한다는 나의 자발적 노예근성이 나로 하여금 정신없이 쌈을 그 누구보다 빠르게 뜯게 만들었다. 그러나 돈을 안받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노동과정에서 나의 몸을 최대한으로 아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점차 나의 쌈뜯는 자세는 발가락부터, 정강이, 무릎, 허리, 목까지 모두 유연하게, 자유자제로 사용할 수 있는 자세로 바뀌었는데. 이렇게 자유자제로 내 몸의 자세를 실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내가 돈을 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내 몸에 최적화하기 위한 쌈뜯는 자세 실험을 뭐라할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내가 그 쌈채소 하우스에서 일할 마지막 쯤에는 누워서, 엎드려서, 고양이 자세로, 온갖 요가자세로 쌈을 뜯고있었다. 



나의 쌈-노예생활은, 말은 노예지만, 실은 정말로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곳의 사람들이 내게 친절하고 살갑게 대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하는 노동과 노력에 정당한 보상이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혼내는 일도 많았고, 나에게 심하게 함부로 대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행복했다. 그 곳에서 누릴 수 있는 자연환경, 시설, 밥, 몸의 놀림까지 얻을 수 있는 건 모두 얻어냈다. 난 그 곳에서의 나의 삶이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정말 끝까지 착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착한게 아니라, 속으로는 천불을 내고 쌍욕을 하면서도, 겉 모습은 최대한의 평정함과 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했기 때문에. 나는 내면이 폭발해 외면으로 뛰쳐나가는 것과, 폭발하는 내면을 외면이 안간 힘을 써서 꾹꾹 누르는 것 사이의 아주 첨예한 평정심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데, 그 첨예한 평정심에서 가장 강렬한 행복이 있다. 서울에서 내가 온갖 유형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려고 내적으로 혼자 고민하고 마음 고생한 시간이 그 강렬한 행복으로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가장 착한 사람이 가장 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그렇게 끝까지 착하게 살다보니 주변의 많은 도움이 따라왔다. 일단 아빠와의 관계가 좋아졌다. 그 곳에서 내가 버틴 것에 비하면, 아빠는 내게 정말로 큰 사랑을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늘 부족한 줄만 생각한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나를 늘 커다랗게 돕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원래 불교 공부모임을 하는 인연으로 서울에 갈 때마다 경국사라는 절에 들렸는데, 그 절의 스님들이 나의 겉으로는 지쳐있는데 약간 광기어린 착한 모습을 보고는 늘 나를 쉴 수 있게 도와주셨다. 조금의 봉사를 하고 템플스테이를 무료로 할 수 있게 해주셨고. 절에 갈 때마다 차를 따라주시며 나를 쉴 수 있게 해주셨다."법우님 좀 쉬세요 .아무것도 하지마요 그냥" 스님이 내게 가장 많이 해주신 말이다. 친구들은 어떤가. 서울에 있을 때만 해도 이젠 나와 삶의 방식이 다르다고 생각하며 마음이 멀어졌던 내 대학시절 친구들은. 내가 그 곳에서 버티며 얻은 깨달음들을 재미있게 들어주며 내게 맛있는 것을 사주었다. 이런 원래는 알지 못했던 고마움을 깊이 깨닫는 과정에서 사람은 더 자유로워지곤 한다. 나는 이 고마움을 어떻게든 갚고자. 쌈채소 농장에서 일하면서 원래 뽑아서 버려야 할 쌈채소들을 상자에 담아서 우체국에 가져가 엄마, 아빠, 절, 교회, 친구 할 것없이 다 날려보냈다. 그게 꼭 쌈채소를 훔치는 것 같이 느껴졌지만, 어차피 버리는 것, 나의 감사함을 갚기 위해 나의 몸은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다. 나의 착함은 더 이상 쳐박히는 것을 멈추고, 나비처럼 훨훨 날아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가 쌈채소를 보낸 곳에는 교회도 있었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광천의 평지교회. 홍성에 나를 보러 놀러온 교회다니는 친구를 따라 우연히 들렸던 한적한 시골마을의 작은 교회였다. 그 때 당시에도 교회에 청년 둘이 왔다고 목사님은 그 지역에 대한 옛날 이야기,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에 대한 재미있는 역사이야기를 해주셨고. 목사 사모님처럼 보이시는 분은 그런 우리 먹으라고 샤인머스킷을 준비해주셨었다. 목사님은 목사라는 직함과 어울리지 않게, 어릴 때 초등학교 만 나오고나서 서당에 들어가 그 이후로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에 가실 정도로 한학에 조예가 깊으신 분이었다. 그 만남 이후 2달정도가 지났고, 무임금 노동을 계속하며 쌈을 훔치고, 누워서 쌈을 뜯고, 돈을 벌지 않는데도 가장 큰 행복을 누리던 그 때. 하지만 툭하고 누가 건드리면 바로 울어버릴 수도 있었던 그 때. 나의 발길은 주기적으로 광천의 평지교회를 향했다. 아마도 열심히 분투하고 있던 나의 착함이 더 편히 그 능력을 활용하고자 나의 발을 움직이게 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나의 착함으로 굶어죽지 않기 위한 두번째 모험이 시작되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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