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자동 사람들: 정택진:빨간 소금:2021
어릴 적 살던 고향은 농사를 짓는 시골마을이라 지금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부모님과 같은 노인들이다. 한가로운 낮 시간에는 동네에 아이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가끔 길 고양이들만 나른히 돌아다닐 뿐이다. 그런 마을에 유일한 젊은 언니가 한 명 있다. 나보다 2살 많은 연지(가명) 언니다. 언니에게는 아이가 둘이 있고, 두 아이는 어느새 초등학생이 되었다. 언니와 두 아이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재잘재잘 소리를 낸다.
언니는 나보다 2살 많았지만, 학년은 나보다 한 학년 위였다. 언니의 엄마가 언니의 남동생과 함께 초등학교를 보냈기 때문이다. 언니가 정확히 어떤 장애등급을 가졌는지는 물어보지 않아서 정확하게 모르지만 아마도 발달장애가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언니의 엄마는 언니의 남동생에게 언니를 책임지게 하고 싶었던 것 같지만 언니의 남동생은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 뒤에 언니의 엄마가 한 일은 언니를 시집보내는 일이었다. 비슷한 발달장애를 가진 적어도 10살 이상 많은 남자를 소개받아 언니를 결혼시켰다.
언니는 남편도 생기고 자식들도 생겼는데, 여전히 언니의 엄마와 함께 산다. 남편은 직장을 가지고 있지만 일상적인 생활을 하기는 불편할 거라는 언니의 엄마의 평가가 반영되어 언니의 남편은 돈을 벌어 생활비를 보태고, 언니는 자녀들과 함께 언니의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서 살고 있다.
동자동 사람들은 서울역 근처에 있는 동자동이라는 쪽방촌 실태조사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정택진은 연세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대학원 문화인류학과에서 [쪽방촌의 사회적 삶:서울시 동자동 쪽방촌을 중심으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때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동자동 사람들'이 써졌다.
문화인류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우리나라 쪽방촌의 실태라고 하면 논문처럼 딱딱할 듯하다고 생각되지만 이 책의 제목이 그러하듯 내용도 그냥 사람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 학문적 근거를 보여주면서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양상과 그에 속해 있는 사람 간의 관계를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다.
서문 가난을 쓴다는 것에서 시작되는 동자동 사람들의 이야기는 쪽방촌의 어제와 오늘, 돌봄의 역설, 죽은 자를 기억하는 법, 우리는 거지가 아니다, 방치된 시간의 무게로 이어진다. 첫 번째 쪽방촌의 어제와 오늘에서는 생각보다 쪽방촌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이야기와 그곳의 구성원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현재 쪽방촌은 우리 사회의 노동시장에서 '잉여'인구들이 주로 살고 있으며 이곳에는 주민의 삶에 개입하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다.
칼 마르크스가 말한 ‘잉여 인구’는 노동시장 바깥에 존재하지만 산업예비군으로서 도시의 생산 체계 안에 잠재적으로 흡수될 수 있는 이들이다. 반면 후기 자본주의에 등장하는 잉여 인구는 말 그대로 더 이상 노동시장이 필요로 하지 않는 ‘잉여’다. p. 33
두 번째 돌봄의 역설, 죽은 자를 기억하는 법, 우리는 거지가 아니다에서는 쪽방촌에 자리 잡고 살고 있는 다양한 인물과 돕기 위한 개입을 시도하는 여러 단체가 등장한다. 이를 통해 쪽방촌 사람들의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일상을 조명한다. 그분들의 삶은 얼핏 우리와 달라 보이고 힘겨워 보이지만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아가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음이 보인다. 우리와 우리가 아닌 것에 선을 긋고, 그 안에서 상호 연대한다.
천 원의 밥값은 분명 주민들이 서로의 인격과 자존감을 지키고 상호 의존의 연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돕는 매개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천 원의 밥값을 통해 만들어진 상호 인정과 연대의 뒤편에는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고, 내부로 진입할 수 있는 자격을 끊임없이 추궁하며 ‘우리’가 아니라고 판명된 대상을 바깥으로 축출하는 구분 짓기와 배제의 과정이 자리 잡고 있다. p. 203
그러나 현재 쪽방촌은 무너지고 있다. 불편하고 지저분하긴 하지만 상호 연대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길이 자꾸 열리고 있는데 그 길을 보는 시선이 어쩐지 곱지 않다. 그건 나의 시각일 수도 있고, 작가의 시선일 수도 있다. 가난과 무지는 분명 불편하고 마뜩지 않은 존재들인데 그들의 삶을 내밀히 살펴본 정택진 작가의 시선을 쫓아가다 보면 어?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주 어렸을 때 나에게 연지언니는 좀 모자라지만 착한 언니였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같이 놀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언니는 중학교를 가지 못했고 오가다 보면 언니의 엄마가 좀 안쓰러웠다. 그러다 언니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까? 잠시 생각해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언니가 낳은 아이들이 똑같이 발달장애가 있다는 이야기를 친정어머니께 전해 듣고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었다.
책을 읽고 돌이켜 보니 나는 한 번도 언니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않았다. 언니의 엄마의 입장에서, 언니의 동생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은 있었겠지만.. 언니를 주체적으로 놓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리고 언니에게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언니는 지금 행복한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충분히 생각하고 대답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자동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들이 읽고 생각을 바뀔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출판된 책 같다. 동자동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사회의 잉여 인구 또는 약자들과 우리가 어떻게 함께해야 할지 고민하게 한다. 언뜻 보면 이 문제는 나와 분리된 다른 세계의 사람들 이야기 같다. 그러나 작가는 말한다. 그렇지 않다고. 동자동과 그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대우받지 못하고 쪼개지고 무너지는 것은 곧 당신도 무너지는 걸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인간은(아니 나는) 그렇다. 이타적인 생각을 하면서 살고 싶지만 이기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그들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했을 때 더 잘 움직여진다. 이 책은 그 지점을 흔들어줌으로써 경각심을 일으킨다.
타인에 대한 동정심은 타인을 보듬고 울어주고 작은 보살핌은 줄 수 있지만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내 위치가 흔들린다고 하면 우리는 움직이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동자동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작가의 야심 찬 계획이 들어 있는 아주 쉽고 좋은 책이다.
정영희와 송미영이 다시 동자동 쪽방촌으로 돌아오길 선택한 이유는 쪽방촌에 축적된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살아갈 때 비로소 돌봄을 주고받을 수 있는 주체로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동자동 쪽방촌 이외의 다른 주거 공간이 훨씬 더 나은 물질적 환경을 제공할 수 있지만, 그것이 동자동 쪽방촌에 축적된 사회적 관계와 분리될 때 주민들의 삶은 결코 온전한 형태일 수 없다. p. 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