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룰루 밀러;곰 출판;2021)
지난해 12월 출판되어 어느새 12쇄를 찍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명과학으로 분류된다. 책의 저자 룰루 밀러의 소개를 보면 방송계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피버디상을 수상한 과학전문 기자로 표현되어 있다. 작가와 분류, 게다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제목과 '삶의 질서'라는 부제를 보고 있으면 생명과학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라 독자는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책은 물고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생명과학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액자식 구조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화자는 상실의 아픔을 겪었다. 자신이 바람을 피워 함께 동거하던 남자 친구를 잃고, 상실의 아픔을 극복할 수단으로 '데이비스 스타 조던'의 일대기를 뒤쫓는다.
결코 승리하지 못할 거라는 그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로 하여금 혼돈을 향해 계속 바늘을 찔러 넣도록 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중략... 아무 약속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희망을 품는 비결, 가장 암울한 날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비결, 신앙 없이도 믿음을 갖는 비결 말이다. P. 66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1851년 미국 뉴욕주 북부의 과수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상의 모든 생명에 관심을 가졌으며 대학에서 생물을 공부한다. 그리고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프롤로그부터 초반에 등장하는 데이비스 스타 조던은 수줍음 많은 소년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공부를 놓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멋진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재미가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고기 분류에 혼신의 힘을 바쳤던 한 학자의 일대기라니 조금 뻔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가 물고기 분류를 위해 물고기를 잡는 여러 방법들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혐오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책이 작가가 바람과 비슷한 일탈을 극복하기 위해 이 사람의 업적을 집착적으로 뒤지고 다닌다는 것도 마음에 드는 설정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조금씩 이상해진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옹호하고 거기에 아버지를 연결시키던 작가의 이야기는 조금씩 어긋나며 나를 기분 나쁘게 하더니,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스탠퍼드 대학의 초대 이사장의 부인을 독살했다는 의혹이 등장하면서 완전히 다른 사실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마치 지금껏 당신들에게 했던 이야기는 이 폭탄을 연쇄적으로 터트리기 위한 것이었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 책의 기둥이 되는 주제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내하는 것이다. 이를 알려주기 위해 미친 듯이 물고기를 수집하여 분류했던 것으로, 후배를 양성했던 것으로, 평화주의자로 알려진 데이비스 스타 조던이 등장한다. 그는 수많은 어류를 수집하여 이름을 붙였다. 스탠퍼드 대학을 자신과 연구했던 사람들로 채운다. 마침내 우생학을 만천하에 부르짖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그렇게 된 이유를 작가는 처음부터 하나씩 힌트를 주고, 여러 학문적 근거들로 채워나간다.
바우마이스터와 부시먼은 이렇게 썼다. ”공격적인 사람들은 대개 자신을 매우 높게 평가하는 이들이며, 이에 대한 증거는 민족주의적 제국주의, ’ 지배자의 민족‘이데올로기, 귀족들의 결투, 학교에서 약자를 괴롭지는 아이들, 길거리 깡패들의 언어 구사 등에서 볼 수 있다.
또 하나 특기할 사항은 긍정적 착각 지수가 높게 나올 법한 이들 중 많은 수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특이한 기벽 하나를 공유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손으로 혼돈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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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마이스터와 부시먼은 이렇게 썼다. “쉽게 말해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자신을 우월한 존재라고 보는 사람들이라기보다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보고 싶다는 욕망이 강한 사람들이다. 거창한 자기상을 확인받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비판당하는 것을 몹시 괴로워하며 자기를 비판한 사람을 사납게 공격하는 것으로 보인다”. p. 150
룰루 밀러는 생물학적인 시선만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야기를 싣고,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일대기를 기자로서 파고들어 엮는다. 그 사이사이에 심리학적 이론과 생물학적 지식, 사회적인 문제 등을 적절히 배합한다. 이 모두는 각자의 이야기 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실의 기반에 둔 이야기이지만 과학책이라고 할 만큼 사실만 기반에 둔 이성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다고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일대기를 다룬 평전으로 보기도 어렵다. 작가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데 모두 사실은 아닌 것도 같고 사실 같기도 해서 액자식 구성의 자전적 소설 같지만 그렇다기엔 참고문헌이 너무 많다. 우생학에 희생된 사람들을 찾아가서 인터뷰를 읽고 있으면 마음에 큰 움직임을 주지만 인터뷰집이 아니다. 설명을 위해 등장하는 심리학 용어 그릿, 수집 습관 등에 관한 설명을 읽으면 심리학 책 같지만 심리학 책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은 이 모든 걸 자연스럽게 한 권의 책에 녹여내어 독자로 하여금 수긍하게 하고, 새로운 지식을 깔끔하게 습득할 수 있도록 하는 글을 쓴다. 책을 다 읽어 갈 무렵이면 독자는 완전한 혼돈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것 이야말로 작가가 노린 지점이다.
우리는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리리다는 것. 진보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은 확실성이 아니라 회의로, “수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 회의도 닦인다는 것. p. 250
해왕성에서는 다이아몬드가 비로 내린다는데. 그건 정말이다. 바로 몇 년 전에 과학자들이 그 사실을 알아냈다. 우리가 세상을 더 오래 검토할수록 세상은 더 이상한 곳으로 밝혀질 것이다.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 안에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잡초 안에 약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얕잡아봤던 사람 속에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p. 263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p.227
작가의 마지막 고백과 '변화에 관한 몇 마디'를 읽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더 많이 변화하겠구나. 결코 쉽지 않은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들어가고, 12쇄를 찍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샀다면 세상은 희망적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적절한 자기기만과 적절한 그릿, 거기에 물고기자 존재하지 않고 해왕성에는 다이아몬드 비가 내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어울렁 더울렁 사는 세상은 오고 있는 중인 듯 아스라이 잡힐 듯하다. 이 책처럼 어느 주제로도 분류하기 어려운 책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으며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사서로서의 자리는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