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호소의 말들(최은숙:창비:2022)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근무하는 작가의 글을 읽으며 문득 국가인권위원회가 어디에 있고 몇 명이나 근무하는지 궁금해졌다. 아주 익숙한 명칭이긴 한데 주변에서 만나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국가인권위원회라는 명칭에 익숙한 이유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만든 만화책 십시일반, 어깨동무, 사이시옷에서 그 이름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 언젠가 영화도 기획했던 것 같다. 만화책과 영화 둘 다 현직에 있는 작가와 감독이 참여하여 옴니버스식으로 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표지에 적혀있다. '국가인권위원회 기획'이라고.
그러니까 이름은 익숙한 기관인데,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막연했던 것 같다. 우리의 권리에 관한 일을 하고 있겠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최은숙 작가는 국가인권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에서 우리의 모두의 권리를 위해 일하고 계신 분이었고, 책은 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왜 이렇게 모르나 싶어 들어가 보니 1개의 본부와 6개의 사무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직원이 모두 합해서 250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사회 인권 국제 인권, 아동청소년, 장애, 성, 군인, 인권침해, 인권교육 등의 기관이 있는데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회 곳곳에 만연한 인권 관련 문제를 250명으로 가능하다는 자체가 모순으로 보였다. 이분들의 인권은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이라도 인권위원을 찾아가 다시 살펴봐달라고 왜 말하지 못했는지 지금도 후회스럽다. 술자리에서 욕설 몇 마디 내뱉은 것으로 양심의 가책을 상쇄시키는 대신 얼마든지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p. 76
자세히 보아야 인권위까지 찾아온 마음이 보였다. p.109
조사관 한 명당 매해 100건, 많게는 200건을 처리해도 사건 수는 줄지 않는다. 1년이 지나도록 처리되지 않는 ‘장기 미제’ 사건의 처리 계획을 제출하라는 시지가 20년째 반복된다. p1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님과 작가님의 직장동료들은 끊임없이 살피고, 돌보고, 싸운다. 그리고 더 잘하지 못하 일에 치열하게 후회하고, 미제 인권 사건에 대해 아쉬움을 말한다. 그런 멋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작가님은 힘드시겠지만 읽으면서 내내 든든했다. 법적 구속력이 없어 삽으로 한삽한삽 옮기는 일인 데다가, 소수만 일하는 직업에서 일 좀 해봐서 아는데 알아주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지 않으셨을 테다. 그럼에도 맡은 자리에서 묵묵히 긴 세월 삽을 뜨던 여정들을 읽다 보면 사연 하나하나는 안타깝고 슬픈데, 이상하게 나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러면서 스쳐 지나가는 건 나와 함께하는 동료들의 모습이었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 학생 한 명 한 명을 마음으로 아끼고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치열하게 고민한다. 때로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동료에게 상처받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멈추지 않고 웃으며 다시 일어나서 오히려 상처받은 학생과 동료를 다독거린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존재하는 작가님과 작가님의 동료 같은 분들이 내 주변에도 있었다. 그런 멋진 사람들이.
얼마 전에 라디오를(EBS 김겨울 라디오 북클럽) 듣다가 국제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영화 컨텍트를 보면 외계인과의 교신에 대해 국가와 국제사회는 과학자의 말을 잘 들어주고 함께 협력하여 일을 해결해 나간다. 분명 미래사회는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썼을 것이며 당시만 하더라도 수많은 국제기구들이 그런 역할을 해 줄 거라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최근 넷플릭스에 발표된 돈룩업에 반영되어 있다. 칼 세이건이 그린 컨텍트에서와 같은 미래의 국제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이기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전쟁 따위는 없는 평화로운 미래를 상상했지만 여전히 전쟁이 벌어지고 거기에 희생되는 개인들이 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암울하다. 거대 조직은 어쩐지 늘 이기적이고, 뉴스에 나오는 개개인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공무원 사회에서 모든 첫 번째 사례는 어떻게 생겨난 거지? 선례의 선례가 되는 사례가 있어야 선례가 생기는 법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첫 번째 선례는 내가 만들어보자. p. 135
그러다가 어떤 호소의 말들 같은 책을 읽으면 나는 다시 조금 말랑해진다. 세상은 그렇게까지 엉망은 아니야. 이렇게 따뜻한 한 명 한 명이 노력하고 귀 기울이고 있잖아. 그래 그러니 나도 안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단단하게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고 함께 가자. 좋은 것들을 보고 그들의 모습을 배우자. 조직에 세상에 상처받고 힘들 때 마음에 밴드가 필요한 순간이면 이제부터 나는 '어떤 호소의 말들'이 떠오를 것 같다. 그리고 어디든 호소할 곳이 있다면 이 조직을 더 키워달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세계 인권선언문 제1조의 이 문장이 인류의 약속이 되기 전까지 모든 인간은 똑같이 존엄하지 않았다. 존엄은 쟁취된 것이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마치 하늘에서 툭 하고 존엄함이 떨어져 인간의 뼛속에 박힌 것처럼, 우리가 우리를 존귀한 존재라고 믿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모두가 존귀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인류의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귀족만, 백인만, 남자만, 비장애인만, 이성애자만 들어갈 수 있는 존엄의 테두리를 계속 넓혀온 역사를 알고 있다. 그 역사의 페이지마다 형언할 수 없는 살육과 전쟁이, 배제와 차별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한 투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p. 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