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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Jun 18. 2021

팝콘을 먹으며 옛 추리영화의 추억을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히가시노 게이고: 2021 : 하빌리스)


남편이 좋아하는 작가 일 순위로 뽑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 아닌 신작을 함께 읽었다. 히가시노 게이고 하면 '용의자 X의 헌신', '방과 후'같은 오래전에 인기가 많았던 추리소설이 떠오른다. 또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라는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 한 권이 떠오르고, 히가시노는 글 공장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늘 꼬리표처럼 생각난다. 끊임없이 신작을 발표하는 그의 소설을 복불복이라고들 하고, 나도 처음에는 몇권 읽다가 곧 그만 읽게 되었던 작가였다.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를 나는 별로 읽을 생각이 없었다. 표지부터가 내 취향은 아닐뿐더러 20대에는 일본 소설을 한참 좋아했었지만 최근에는 찾아 읽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곳곳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펜들이 있었다. 직장동료도, 나의 남편도, 함께 독서모임을 하는 분들 중에도. 히가시노 게이고, 미스터리라는 이유만으로 주변 사람들은 읽고 싶어 했고, 독서모임 책으로 선정되어 결국 읽게 되었다. 별로 읽고 싶지 않아서 미뤄둔 사이 남편이 먼저 읽고, 나는 겨우 독서모임 이틀 전에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다. 조금 두껍지만 술술 후루룩 뚝딱 읽고 처음 든 생각은 '생각보다 괜찮은데.'였다. 


그리고 남편과 추억 이야기를 나누었다. 

"LP에서 CD로 넘어가는 시대라니 도대체 언제인 거야? 일본은 꽤 오랜 시간 LP를 들었으니 80~90년대까지도 있었을 거야. 테이프도 나오고.. 추억이 새록새록하네."

"이 책의 주인공인 캠페니언은 80년대에 한창 활동했다니까 그때가 배경인가 봐. 대학교 때까지 테이프로 노래 들었잖아."

잠시 그 시절 들었던 노래를 생각하고, 숱하게 다녔던 노래방의 추억을 생각하며 우리는 침묵했다. 

"근데 차 안에 전화기는 뭐야? 휴대폰 아니었어?" 

"예전에 비싼 차에는 전화기 있었던 거 아니야? 왜 텔레비전에서 나왔던 것 같기도 한데... 휴대폰 없이 방에서 통화하고, 부재중일 때 메시지 남기는 장면도 진짜 오랜만이었어."

"그런가. 호텔 방문 여는 거 열쇠로 하는 것도 그렇고, CCTV 없이 추리하는 것도 진짜 오랜만이네.. 요즘 같으면 이렇게 안 썼을 텐데.. 벌써 잡았겠다. 얼마 전에 마우스에서 비슷하게 호텔 방문 여는 거 나왔는데 제대로더라고 그거  모방범죄로 이어질 수 있겠던데.. 그에 비하면 이 책은 귀여운 수준이야 요즘은 절대 통할 수 없는."

"응. 나름 재미있었어. 추억도 생각나고 과하게 무섭지 않은 추리도 재미있었어."

그렇게 우리 부부는 복고 미스터리에 관한 가벼운 독서모임을 했다. 


그리고 '독서모임의 날'에는 책을 추천한 분이 '엄청난 실망'이었다는 이야기를 먼저 하셨다. 모두들 실망스럽고 유치했다는 평가를 내리는 동안,  '저는 재미있었어요.'라고 용기 있게 말했다. 다른 휘둥그레진 눈들이 재미있었다.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아주 초기작으로 그가 이제 막 작가로 데뷔한 시절의 풋풋함이 그대로 묻어있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이 당시에도 상당한 다작으로 일본에서도 유명했던 것 같은데 이 책도 마감날의 압박에 시달리며 5회 만에 연재를 끝냈다고 되어있다. 1988년 당시 일본의 거품 경재가 끝나가던 시절의 모습을 가볍고 쉽게 풀어썼다는 것이 역자의 말이다. 


역자의 말처럼 정말로 가볍고 쉽다. 살인사건이 배경임에도 잔인하거나 무섭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읽고 싶다고 하신 분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정말 좋아하시는데 가장 재미있게 읽은 그의 책이 '백야행'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용의자 X헌신'을 좋은 작품으로 꼽았다. 사실 나에게는 그의 작품을 더이상 읽지 않게된 시작점이 있다. '연애의 행방'이 그것이다. 이 책은 추리소설인 줄 알고 읽었는데 스노보드를 좋아하는 작가가 스키장을 배경으로 여러 남녀의 이야기를 단편으로 묶은 것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이라 당연히 추리인 줄 알고 읽었다가 가벼운 연애소설 아닌 듯한 연애소설에 실망한 경우였다. 그런데도 결국 다 읽긴 읽었다. 쉽게 읽히고, 읽으면 결국 범인이라고 해야 하나 어떤 결론이 궁금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마 모임 구성원 분들도 내가 '연애의 행방'을 읽을 때 느꼈던 비슷한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으리라 짐작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몇 권 읽어보진 않았지만, 처음으로 그의 책으로 독서모임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재미와 추리에 따스함이라는 기본적인 틀 안에서 다양한 변주로 독자를 즐겁게 하는 작가. 내가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이야기에 반신반의 하는 모임을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을 이야기했다.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장면은 마지막에 독자에게 어떻게 사건이 마무리가 되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두 주인공이 기차가 들어오는 플랫폼에 앉아 있다. 여자가 독자가 궁금해할 부분을 질문하고 형사인 남자가 대답한다. 그사이 그들은 팝콘을 사서 나눠먹는다. 대답을 하고 팝콘을 사고, 대답을 하고 팝콘을 먹고, 질문을 하고 남자가 산 팝콘을 여자가 뺏어먹는다. 마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며 수다를 떨듯 사건을 마무리한다. 돈과 살인사건 그리고 사랑이 얽힌 이야기가 탁구공을 주고받듯 가볍다. 나는 그 장면이 장소에 관한 묘사가 없음에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내 눈으로 보고 있는 듯 생생하게 그려져서 오래 기억에 남았다.


함께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은 역시나 갸우뚱했지만 나는 어쩐지 그 장면이 좋았다. 독자를 지루하게 하지 않는 그의 마법 같은 필력이 많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세상에는 많고 많은 이야기가 있다. 픽션도 논픽션도 있다. 개중에 이런 따뜻하고 즐거운 작가가 있어서 좋지 아니한가 싶다.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심란하여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도 손에 들면 술술 읽을 수 있는 책.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책.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은 그런 책이다.  (백야행 같은 책은 좀 무섭고 잔인하다니 좀 다를 수도 있겠다.)


"이상할 것도 없어. 잘못짚는 게 어디 한두 번인가. 문제는 그 실수를 어떻게 다음 단계에 활용하느냐는 거야. 수사란 한걸음 한걸음 착실히 걸어가는 머나먼 길이라고."-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 중에서


그의 초기작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동안 읽었던 그의 책 몇 권이 스쳐 지나갔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지금도 열심히 쓰고 있을 것이다. 마감기한을 지키며. 너무 가볍게 다작을 한다며 늘 작가의 뒤담화를 했었는데 이제 하지 않을 것 같다. 어쨌거나 이렇게 꾸준히 다른 이야기를 써내는 일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의 자주 독자들의 선택을 받는다. 어쩐지 작가가 다양한 활용과 변주를 고민하며 머나먼 길을 한걸음 한걸음 성실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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