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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Aug 04. 2021

기억은 아름답고, 미래는 봄이다.

친구의 전설(이지은 그림책;웅진주니어;2021)

이상한 부분에서 눈물이 터질 때가 있다. '친구의 전설'은 그런 책이었다. 심술보 호랑이의 꼬리에 달린 민들레를 볼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기어코 심술보 호랑이와 결코 친절하진 않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꼬리 꽃의 이야기 에 뭉클해지고 말았다. 아이들 앞에서 울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엄마가 '암'에 걸리셨다. 동생들이 운다. 엄마도 눈물이 글썽인다. 남편도 장모님 걱정에 하늘이 무너지는 표정을 한다. 그런데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아서 일까... 생각해본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 나는 더 이상 주변 사람들 앞에서 웃지 못하는 사람이 될까 봐 겁이 난다. 그들의 걱정스러운 말들도 듣기가 싫다. "여보, 나는 눈물이 안나."라고 말했더니 남편이 말했다. "당신은 맏이라 책임감이 더 커서 눈물이 나이 않는 것 같아. 감정적으로 빠지기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 같아. "라고. 그런가... 생각해보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암'이라는 것은 이미 알게 되었지만 대형병원으로 가서 다시 검사를 받고 치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엄마와 둘이서 갔다. 갈때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순서가 가까워지자 진료실에 들어가기 전부터 긴장이 되었다. 의사 선생님의 말에 엄마가 어떻게 반응할지 두려웠다. 혼자서 엄마의 마음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무서워 졌던 것도 같다. 그러나 엄마는 외려 담담하다. 진료가 끝나고 8개의 검사를 받기 위해 큰 병원 곳곳을 돌아다녀야 했다. 상담직원이 A4 한 장에 그려진 병원 지도에 나와 엄마가 오늘 할 일을 표시해주었다. 종이를 받아 들고 첫 번째 검사를 하러 들어간 엄마를 보며 잠시 긴장이 풀린다.


첫 진료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에게 전화를 건다. 모두에게 담담하게 때로는 웃으며 오늘은 별거 없었다고, 검사를 하고 2주 뒤에 결과를 듣게 될 거라 전한다. 마지막으로 남편에게 전화를 하는데 순간 목이 메었다.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를 일이다. 엄마가 검사를 마치고 나오자 나의 눈물을 쏙 들어갔다. 그리고 엄마를 이끌고 상담사가 그려준 지도를 따라 순서대로 검사를 다녔다. 중간에 밥도 먹고 커피고 마셨다. 덤덤한 내가 또 이상하다.


그리고 생각한다. 엄마의 암은 별거 아니라고. 나이가 드니 주변에 암에 걸려 있는 사람도, 걸렸다가 나은 사람도, 걸렸다가 이제는 이 세상에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을 보아왔기에 엄마의 암이 천천히 나을 거라 희망을 가진다. 당연히 나을 거지만 치료를 해 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을 거라는 것도 짐작해본다. 그래서 또 마음을 다진다. 이 이야기는 이제 새로운 일상이다. 이전과 달라진 이 일상을 잘 살아보리라.


'친구의 전설'은 심통쟁이 호랑이의 꼬리에 꽃이 한송이 생기고 사라지는 이야기이다. 심통쟁이 호랑이는 다정하지는 않지만 옆에 붙어서 싸우면서도 친구를 위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꼬리 꽃 덕분에 조금씩 변해간다. 멋진 친구 되는 법, 세상을 즐기는 법을 알게 된 호랑이는 누런 호랑이에서 하얀 호랑이가 된다. 그리고 꼬리 꽃도 노란 꽃에서 하얀 꽃으로 변한다. 호랑이는 모르지만 하얀 꽃이 된 꼬리 꽃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가 길을 가다 그물망에 갇히게 된다.  꼬리 꽃은 호랑이가 슬프지 않게 이별하면서 호랑이를 구해줄 방법을 생각해낸다. 장난스러운 꼬리 꽃의 이별 놀이와 귀여운 호랑이의 표정을 볼 때부터 나는 울고 있었다.


하늘로 훨훨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와 홀씨를 보게 된 산속 동물들의 출동, 그리고 그 친구들에 의해 구해진 호랑이. 호랑이는 울었냐 하면 울지 않았다. 호랑이가 '어... 어...' 하는데 꼬리 꽃이 하늘을 나르며 말한다. '잘했어, 호랑이. 내 친구.'라고. 그리고 홀씨를 본 동물들이 호랑이를 구해주고 포옥 안아주며 말한다. '우리 이제 모두 친구지?' 이 장면들에 나는 왜 자꾸 눈물이 났을까? 이제 호랑이가 꼬리 꽃을 '후'하고 불고 나면 이전의 것들은 모든 것이 달라짐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알았다. 멀리멀리 날아간 홀씨들이 어떻게 변할지. 그래서 슬펐지만 인정하고 마음을 다독였다.


최근 그런 걸 느낀다. 내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 아버지가 아프실 때도 보호자로 엄마 말고 자녀를 데리고 오라고 병원에서 말했었다. 엄마가 아프셔서 이제 내가 보호자가 되어 단단하게 걸어 다녀야 한다. 얼마나 오랜 시간 내가 기대어 왔는지 셀 수도 없다. 그리고 진작부터 나는 홀로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그늘을 만들었어야 했다. 나의 자녀들에게만이 아니라 나의 부모님에게 까지 말이다. 그렇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두 분의 느려진 걸음, 아픈 손가락, 고혈압, 당뇨 같은 것들보다 내가 기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언제나 그대로 머물러 있었으면 했었다.


부모님과 동생들 앞에서 든든한 나무와 그늘을 만들고 싶었나 보다. 두 분의 자양분으로 잘 자란 내가 그런 나무가 되어서 기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눈물이 나지 않았었나 보다. 그러나 내 안에는 여전히 이전의 것들을 기억하며 돌아가고 싶은 여리고 작은 아기나무도 있다. 그래서 '친구의 전설'을 보며 눈물이 찔끔 났다.  책을 덮으며 조심스레 마음을 다독여본다. 더 많이 변할지라도 잊지 말자고. 이전의 아름다움과 이후에 계속해서 피어날 새로운 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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