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걷고 있다. 커다란 보따리를 짊어지고 보따리 위에는 커다란 라디오 하나가 올려져 있다. 소년은 버스를 기다린다. 트럭도 지나가고, 자전거도 지나가지만 버스는 오지 않는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처음 듣는 음악을 듣는다. 어느새 밤이 되고 라디오도 끝났지만 버스는 오지 않는다. 소년은 버스를 기다리며 잠을 청한다. 다음날 드디어 버스가 왔지만 버스는 사람으로 가득 차서 소년은 탈 수가 없다.
조금 더 기다리다
마음을 바꿨어요.
버스는 안 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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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박타박 걸어서
멀리멀리 갈 거예요.
이 그림책을 그린 작가는 일본인이지만 그림책을 보고 있으면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인도의 풍경 같다. 소년이 쓴 모자도 그렇고 흙먼지 일으키는 땅의 색도 그러하다. 회사 다닐 때 나와 다른 부서에서 일하는 동갑내기 친구가 있었다. 부산에서 올라온 친구였는데 그 친구는 내가 아는 세상을 더 넓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인도를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이 친구 덕분에 인도는 따뜻한 미풍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의 기억 속 인도는 그곳을 사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문학과, 음악, 문화는 내가 한 번도 발을 들려 놓아 본 적이 없는 세계였다. 그녀 덕분에 그녀가 살았던 부산이라는 동네도 동경하게 되었다.그때까지 나의 세계는 누구나 아는 것도 다 모를 정도로 좁았다. 그녀와 놀러 간 부산국제 영화제와 그녀가 알려준 이기대, 그리고 그녀의 집 뒤에 있는 언덕 위 도서관에서 바라본 밤 풍경은 내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그녀를 만나기 전 나의 생활은 학교, 집 정도였다가 회사에 들어가서는 회사와 집이었고, 기껏 해 봐야 라디오와 텔레비전, 책 정도가 나의 취미생활이었다. 그녀는 도서관을 좋아했고, 산을 함께 올랐고, 수동 카메라로 사진 찍을 걸 좋아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는 걸 즐겼다. 막걸리 한 병을 사서 청계천을 혼자 걸어 마시며 풍경을 즐기는 그녀는 바람 같았다.
부산에서 온 그녀는 나랑 똑같이 서울에 처음 올라와서 사는데도 서울의 골목 곳곳을 다 아는 느낌이었다.그녀와 함께 걸었던 인왕산 뒷길의 풍경과 맥주를 마시며 몸을 흔들며 들었던 인디밴드 공연은 마음속에 나의 자유로 남아있다. 내가 찍는 사진 프레임 안에는 나의 내면의 소리가 들어간다는 걸 알려준 그녀. 내 생애 처음으로 소주와 삼겹살을 앞에 두고 책에 대한 수다를 소리 높여하며 책 이야기를 이렇게 즐겁게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지 알려준 그녀. 12월 31일에 다음날 뜨는 해를 보러 동해에 가는 대신 서해로 가서 바다 위로 떨어지는 아름 답고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해를 함께 바라본 그녀. 함께 블로그로 글과 사진을 올리며 서로의 이야기를 글로 공유했던 추억들.
그런 그녀가 언젠가 인도 여행 이야기를 들려줬었다. 인도에서 버스가 고장 나서 멈췄는데 그녀와 친구만 걱정과 한탄을 할 뿐 나머지 인도인 승객들은 그냥 다 같이 나와서 기다리며 그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그 상황이 좋았다고 한다. 그런 여유로움을 만들어 내는 인도의 이야기를 할 때면 그리움 같은 것이 보였다. ‘버스를 타고 ‘의 풍경은 그녀가 말한 인도의 길 풍경 같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그녀는 계약직으로 일하며 열심히 돈을 모아 다시 인도를 오랜 기간 다녀왔다. 돌아와서는 협동조합 같은 곳에 가입해서 농사를 지으러 다니기도 하고, 아시아 어느 나라를 돕는 카페에서 매니저로 일한다는 소식을 끝으로 연락이 되지 않고 있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그녀와의 거리가 조금씩 멀어지다가 영영 연락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종종 보고 싶지만 바람을 닮은 그녀는 이제 연락처도 바뀌었다. 너무 자유로운 아이라 생각이 나면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파란 하늘 아래 흙길에 발자국을 남기며 커다란 보따리와 라디오 하나, 모자를 쓰고 타박타박 걸어서 멀리멀리 가는 소년의 모습에, 그녀가 룸룸파룸 룸파룸 하며 걸어가는 모습이 겹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