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이 친구를 찾으러 맛있는 숲에 들어섰다. 과일, 채소 친구들을 차례로 찾아 가지만 이 친구들은 레몬이 자신의 친구가 아니라고 한다. 과일들이 강한 신맛이 난다며 과일이 아니라 하고, 채소들은 너 같은 반찬은 본 적이 없다며 향신료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말한다. 엉엉 울며 향신료에게로 간 레몬은 깜짝 놀라고 만다. 새까만 선글라스를 쓴 무서워 보이는 친구들이 향신료였기 때문이다. 다시 눈물이 난 레몬이 "어디에도 내 친구가 없어. 나는 향신료도 아닌 것 같아. 엉엉." 한다. 순간 향신료 친구인 고추, 고추냉이, 생강이 선글라스를 벗고 달려와 레몬에게 레몬과 비슷한 유자와 라임을 소개해준다.
어느 날 맛있는 숲에 나타난 비린내, 기름덩어리, 쭈글 쭈글이로 인해. 맛있는 숲의 과일과 채소는 위기를 맞는다. 그리고 나타난 맛있는 숲의 향신료 히어로즈들. 고추냉이, 고추, 생강이 비린내, 기름덩어리, 쭈글쭈글을 없앤다. 그리고 레몬, 유자, 라임이 향긋한 향기를 입힌다. 그제야 레몬의 역할을 알게 된 과일과 채소 친구들은 레몬에게 사과한다. 왜 그렇게 못되게 말했는지에 대한 이유도 말한다. "사실은 귀여워서 질투가 났어."
'맛있는 숲의 레몬'은 아이의 독서수업 책이었다. 작은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수업은 매주 책 한 권을 읽고 독후활동을 진행한다. 선생님이 준비하신 독후활동 자료에 자신의 생각이나 그림을 그려보고, 마지막에는 그와 관련된 만들기를 한다. '맛있는 숲의 레몬'을 읽고 이 책은 어떤 수업을 할까 궁금했었다. 귀여운 과일이 파스텔로 그려져 있는 이 책은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조금 아기 같은 면이 있다. 선생님은 수준은 유아정 도일 수 있지만 재미있는 책이라며 아이들에게 꼭 읽어보라 추천하셨다.
그림책을 읽고 난 뒤 나의 생각은 캐릭터가 귀엽다. 향신료에 관한걸 정확하게 배울 수 있겠군. 책에 등장하는 과일, 채소의 역할에 관해 이야기해봐도 재미있겠어. 그런데 이렇게 레몬의 역할을 정확하게 나누어야 하는 건가.오해했던 채소와 과일이 레몬에게 사과를 하지만 그 사이에 그들이 했던 모진 말들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둥글게 둥글게 하는 곳에 다른 향신료 친구들이 빠진 것도 기분이 나빴다. 옛날 느낌이 물씬 나는 이야기의 흐름에 마음이 삐뚤어졌다.
마침내 줌으로(코로나 4단계로 독서수업을 온라인으로 진행한다.) 시작한 '맛있는 숲의 레몬'은 내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방향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가 수업을 할 동안 다른 방에 있었는데 아이가 수업 중에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엄마, 엄마 나 무슨 과일이나 채소 같아."
"응? 으응...(이쯤에서 '맛있는 숲의 레몬'에 등장하는 과일과 채소, 우리 집에 지금 있는 과일과 채소를 마구 떠올리며 쥐어짜기 시작했다.) 무, 배추, 레몬, 오이..."
아이의 표정이 탐탁지 않다.
"너는 뭘 생각했는데?"
"나는 고구마."
"응? 고구마. 왜 고구마야?"
"그냥 조그맣게 생겼잖아."
"음 엄마는 너 복숭아 같아. 엉덩이가 복숭아를 닮았다고 하면 어때?"
역시나 엄마의 대답을 탐탁지 않아하며 아이는 떠났다.
수업이 끝나고 아무렇게나 던져진 아이가 쓴 독후활동지를 펼쳐보니 '나의 특징을 가진 캐릭터 그리기'가 나온다. 먼저 자신의 특징을 쓰고, 두 번째로 '나의 특징을 닮은 과일, 채소, 향신료를 생각해보고 이유를 써본 후, 캐릭터를 그려보는 활동이었던 것이다. 아이는 자신의 특징으로 '머리카락이 길고, 키가 조금 작다'라고 적어두었다. 그리고 비어있는 두 번째 칸 마지막 칸에는 그만 엄마가 말한 귀여운 복숭아가 그려져 있다. 키가 작고 머리카락이 긴 자신을 표현할 캐릭터를 엄마와 대화 중에 고구마를 떠올려 놓고는 그만 엄마가 말한 복숭아를 그리고 싶어졌었나 보다. 그러니 두 번째 칸에는 쓸 말이 없어진 것이다.
그걸 보고 나는 한참을 나는 채소, 과일, 향신료 중에 무엇이 되고 싶나 생각했다. 고민 끝에 '배추'가 떠올랐다. 나는 배추를 좋아한다. 먹는 것으로도 그 자체만으로도. 아이에게도 말해주었다. "엄마는 배추 같아." "왜?" "엄마 머리카락이 구불구불하잖아." "난 엄마 머리카락이 늘 구불구불해서 펴진 머리가 궁금해." 아이에게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말했지만, 생각할수록 나는 배추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 같았다. 흔히 사람들은 양파 같은 사람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벗겨도 벗겨도 계속 나오는 양파는 속에 다양한 모습을 가졌다고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양파는 벗겨도 벗겨도 계속 같은 맛이 나는 속이 나온다. 그렇지만 배추는 다르다 겉은 파릇하고 단단하다. 알이 꽉 찬 배추는 껍질을 벗길수록 노란 속을 내어놓는다. 노란 속은 부드러워 생으로 된장에 찍어먹어도 맛있다. 쫑쫑 썰어서 빨간 양념에 비벼 먹어도 맛있다. 제일 바깥쪽 아이들은 채소 육수를 만들 때 쓰면 그 달큼한 맛이 우러난다. 중간쯤 위치한 배추 속은 배추전, 배춧국, 샤부샤부에 넣으면 일품이다. 무엇보다 김치로 만들어 일 년 내내 우리의 식탁을 채운다. 팔색조의 매력을 가졌는데 어디에 섞여 있어도 튀지 않는다. 그런 점이 내가 추구하는 삶인 것 같았다.
귀엽지만 조금 거부감이 들었던 '맛있는 숲의 레몬'이 이런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책의 뒤표지에 '과일 채소 히어로즈 시리즈'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다양한 과일과 채소를 오래 관찰하며 그 과일의 특징을 바탕으로 한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 전개를 보여주는 시리즈를 계속 쓰고 있을 것 같다. 여전히 경계를 나누는 책의 내용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레몬의 특징을 잘 살려 재미있게 과일과 채소의 특징을 이해하기는 좋을 듯하다. 다 읽고 아이와 레몬을 잘라서 향기를 맡아보고 레모네이드 한잔 해도 좋을 듯하다.
아이가 자신의 외모를 들여다 보고 거기에 맞는 채소나 과일을 찾아보는 활동은 마음에 들었다. 아이와 아이의 외모에 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좋았다. 덕분에 내 마음을 들여다본 것도 큰 수확이었다. 그런지만 직관적이고 고전적인 양파 같은 그림책은 역시 내 취향은 아닌 것을 느낀다. 이 그림책이 좋냐고 하면 역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 것 같다. 나의 그림책 취향은 역시 배추 같은 녀석이다. 어디에 섞여 있어도 무난한 듯 보이지만 속을 까 볼수록 새로운 숨은 매력을 보여 주는 그런 책.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비범함을 간직한 고수 같은 그림책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