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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Aug 20. 2021

깊이 뿌리 내린 나무가 바로 선다

영원한 유산(심윤경:문학동네:2021)

심윤경 작가는 오래전 할머니와 찍은 사진을 보고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인공인 작가와 할머니의 배경이 되는 곳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기와집들 너머로 멀리 보이는 고풍스러운 유럽식 건물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믿어지지 않도록 아름다운 유럽식 저택을 지은 이는 악명 높은 친일파 윤덕영이었고 언커크로 불리기 이전의 원래 이름은 윤덕영의 아호를 따른 '벽수산장'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벽수산장은 1966년 식목일에 불이 난 후 몇 년간 폐허로 방치되었다가 1973년 봄 할머니와 손녀의 다정한 사진에 마지막 자취를 남긴 뒤 완전히 철거되어 세상에서 사라졌다.(작가의 말 중에서)' 친일파인 윤덕영이 만들고,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언커크)가 사용하던 이 건물은 이후 종종 영화 촬영 장소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6년 내부 공사 중에 불이 났고, 1973년 도로 정비사업을 하면서 남아있던 건물을 철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언커크는 한국의 민주 발전을 대한 보고서를 매년 작성했는데, 당시 정부와 다투는 일이 많다가 1973년에 해체되었다고 한다.


'영원한 유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인 해동, 윤원섭, 애커넌 씨는 모두 실제 하는 인물이 아니라고 작가는 밝히고 있다. 그들은 작가의 상상 속 인물이지만 소설 속 시간의 흐름이라던가 언커크의 모습 같은 것들은 모두 실제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1966년이 시작된 지 며칠 안 된 한겨울에서 언커크에 불이난 식목일까지 4개월간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4개월의 시간 동안 해동이라는 인물은 화가 났다가, 궁지에 몰렸다가, 자신을 인정하였다가, 또 방황한다. 그리고, 나는 그가 이런 마음을 먹었다고 생각한다. 영원히 남는 유산이 모두 소중하고 고귀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적절히 버리는 그 지점이 아름답다. 이런 마음을 먹은 해동의 행동이 바로 작가의 생각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조심스레 해 보았다.


해동은 언커크 언덕을 내려왔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언커크에 계약직으로 고용된 해동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사직서를 냈다. 그리고 다른 일을 하고 있었지만 온 동네가 떠들썩하도록 불이난 언커크를 보고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름답지만 불편했던 그곳에서 만난 것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아니 이 상황마저도 기회로 삼으려고 눈을 반짝이고 있는 친일파 윤덕영의 딸 윤원섭을 보게 된다. 해동이 윤원섭을 보며 떠올린 것은 사촌 형이다. 부모가 가진 땅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어머니를 들볶은 아들. 해동은 그날이 식목일이라 결혼할 여자의 가족들과 산에 나무를 심었다. 연탄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땔나무를 써야 하는데 산에 나무가 없어 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살기 위해 나무를 심는 날. 적이 지었지만 아름다운 건물이 불에 타는 날. 그날은 식목일이었다.


이 소설은 그 유별난 잊힘에 대해 8년간 궁리한 결과다.

띠지에 적혀있는 작가의 말은 처음 책을 볼 때는 언뜻 믿기지 않는다. 책의 두께가 그다지 두껍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읽어보면 얼마나 많은 조사와 고민을 했는지가 느껴진다. 이 책은 주인공 해동의 성장 스토리이자 우리 역사의 부끄럽고 슬픈 이야기의 한 장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해동의 성장은 민중의 성장이다. 역사의 부끄럽고 슬픈 이야기는 조선왕조의 몰락이며, 친일파의 행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이며,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져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처음에는 한 걸음 떨어져서 보았는데 차츰 해동의 흔들림에 감정이입이 되고, 마지막에는 그의 결정을 응원하게 된다.


언커크의 다른 직원들처럼 카스텔라를 집어먹으며 세상의 불의함을 투덜거리고 여전히 잘 나오는 월급을 받으면 된다. 심지어 그의 것은, 달러였다. p. 233

애커넌 씨와 개인 간 고용으로 만들어진 언커크의 일자리. 그런 미미한 것들은 길가의 거미줄처럼 금세 더럽혀지고 아무 발길에나 찢어지고, 제일 먼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런 것이 존재했다고 증언해줄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 그것이 실제 있었다고 말할 근거조차 희박해지는 것들뿐이었다. 그에 비하면 윤덕영은, 벽수산장은, 언커크는 얼마나 확실하고 단단하고 부인할 수 없이 존재하는가 p. 248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가서 일찍 죽어버린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나를 키워 주고 싶어 했지만 자신의 삶도 빠듯하여 선교사의 집에 해동을 맡긴 고모. 미국인 선교사의 가르침. 해동은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에게 애커넌은 적의 건물이면서 동시에 선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그가 고모로 인해 고모가 소개해 준 여자로 인해 조금씩 흔들리고 뿌리내린다. 부숭부숭한 어머니와 억센 형제자매들은 진형의 깊은 뿌리였다. 해동이 가지지 못한 그 건강하고 단단한 뿌리들을 해동에게 나누어줄 것이다. p. 245


심윤경작가의 영원한 유산의 글은 간략하고, 정갈하다. 그 정갈함 속에 힘이 있다. 문장 하나하나가 아름답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면서도 많은 등장인물의 감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있는 지점도 좋다. 이런저런 지점에서 훌륭한 책이었지만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 바로 저 부분이다. 뿌리내리지 못한 해동이 갈피를 잡지 못할 때 건강하고 단단한 뿌리를 찾아 마음을 여는 장면 말이다. 한국인의 삶을 저만큼 간결하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다. 문학적 은유가 훌륭하여 이리저리 해석해보고 다양한 방법으로 생각해 보는 책도 훌륭하지만. 이렇게 명확하게 전달하면서도 문학적 성취가 살아 있게 글을 쓰시는 작가님이라 설렜다. 애커넌이 하필이면 식목이 불에 타버려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왔을 것 같으니 말이다.


“잘 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좋은 데다 심어야 한다.” p. 263

“순서가 있지 순서가, 저런 데에 나무가 서려면 씨앗부터 천천히 자라야 해. 이렇게  산 안쪽에, 그나마 흙이 좋은 데부터 나무가 서야지. 그러면 나중에 저렇게 박한 땅에도 씨앗이 떨어져서 자라겠지. 하지만 지금 저기다가 나무를 세우려고 하면 되지도 않는단 말이야. 뭐든지 제대로 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단 말이네.”p. 264


식목일에 해동에게 새로운 가족들이 들려주는 나무를 잘 심고 가꾸는 방법은 결국 우리나라를 향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한다. 세상만사는 결국 같은 결이다. 좋은 데다 심고 순서를 잘 지키고 오래오래 기다려야 제대로 뿌리내린다. 성급하게 아무 곳에나 심어놓고 제대로 돌보지도 않으면서 금세 커다란 나무가 되기를 바라며 닦달하면 안 된다고 알려준다. 영원한 유산은 그런 책이다.


#1960년대 #일제강점기 #통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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