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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Aug 24. 2021

그 안에 나를 넣어본다.

피프티 피플(정세랑: 창비:2016)

우선 목차를 본다. 진짜 50명인지 세어본다. 목차의 마지막이 '그리고 사람들'이어서 약간 실망한다. 50명을 결국 다 못 채운 건가 하고 말이다. 그러다 3명이 한꺼번에 적혀있는 걸 본다. 그럼 잠깐 목차가 50개가 맞는 건가 의심이 든다. 하나씩 세어본다. 목차는 50개이고 사람의 이름은 51명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이제 송수정을  읽는다. 첫 문장을 읽고 마음을 빼앗긴다. '담당 교수 뒤에 의자도 없이 서 있던 젊은 의사가 위를 올려다보며 고개의 각도를 조금씩 계속 바꾸었다.' 외래환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글썽이지만 애써 눈물을 참고 있는 의사를 표현하는 문장이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나오는 따뜻한 의료인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앞으로도 이런 이야기가 계속되는 건가 하게 된다.


2019년 사제동행 독서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1학년 학생이 '피프티 피플'을 독서모임 책으로 정했다고 말했다. 순간 호기심이 생겼다. 피프티 피플이라는 제목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주인공이 50명이 등장하는 소설이에요." "응? 50명이나?" "네. 괜찮은 소설이라고 하더라고요.""그렇구나 나중에 읽고 어땠는지 말해줘." 50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이라니 나의 상상력 속에서는 도무지 그릴 수 없었던 것 같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학생이 보고서를 제출할 때 책이 어땠냐고 다시 물어봤더니 '괜찮았어요. 서로 연결되는 듯 되지 않는 부분이 재미있었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대답에 이 책을 읽고자 하는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어찌어찌 2020년이 되어서야 '정세랑 작가'를 애정 하게 되면서 되짚어가다 보니 기억에 남았지만 읽지 않았던 피프티 피플이 정세랑 작가의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쉽게 이 책에 대해 알기를 포기했던 2019년의 나를 원망해본다.


외래환자의 보호자인 송수정편을 시작으로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 간호사, 보안요원의 이야기나 나온다. 그러다 다시 환자의 보호자, 환자, 의사, 그 주변의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기는 병원과 병원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한마디로 말할 수 있겠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읽어나가다가 개개인이 연결되어 있는 지점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A4 한 장을 펴놓고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2019년 학생의 말대로 각자가 알게 모르게 연결되어 있는 그 지점을 찾는 재미가 쏠쏠했다. 몇 개 놓친 것 같은데 다시 찾으려고 사람들 사이를 헤매고 다니기도 했는데 찾아내면 미로에서 길을 찾은 것처럼 기뻤다.


그렇게 종이 한 장에 완성한 관계도는 복잡했고, 질서가 없었다. 조금씩은 서로가 연결되어 있지만, 어찌 보면 이 정도가 연결되어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한 것이다. 시작점과 끝 지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스쳐 지나가듯 만나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기도 한다. 소개팅에서 만난 사람일 수도 있고, 같이 근무하는 사람인 경우도 있었다. 병원과 모두 연결되어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모두 같은 동네에 사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심지어 외국인도 2명이나 등장한다. 그런데도 묘하게 연결되어 모두가 뭉쳐져 있는 느낌이 있었다.


한 사람이라도 당신을 닮았기를, 당신의 목소리를 말하기를 바랍니다. 바로 옆자리의 퍼즐처럼 가까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말)

정세랑 작가는 자신의 마지막 말 같은 책을 쓰고 싶었던 것 같고, 나는 해냈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을 때도 좋았지만 저 문장을 읽으며 가까이 생각하고 있는 50명 아니 그 이상의 이웃들이 를 안아주는 기분이 들었다. 책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다. 그리고 내가 느낀 50편의 이야기와 다른 사람이 느끼는 50편의 이야기가 정말은 다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2019년에 학생이 말했던 50명이 등장하고 그들 간의 연결고리가 조금씩 등장한다는 공통점 외에는 각자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었다.


나는 이야기 속에서 어떤 문장을 찾았고, 읽었고, 기억하려 정리했다.



어디서나 있을 법한 사람들의 생각.. 그러니까.. 이건 내가 늘 가지고 있는 생각들.

가장 잘하는 일이 돈을 별로 못 버는 일일 수 있다. p. 225

호감. 가벼운 호감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일들이 시작되는지. 좋아해서 지키고 싶었던 거리감을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나서 스스로 한심하게 여겼는데, 어쩌면 더 좋은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몰랐다. 혜련은 기가 막혀서 혼자 더 웃었다. 웃다가 어학 학습기에 이어폰을 연결했다. p. 248

“복지가 좋긴 좋다.” “응?” “복지잖아. 어머님 좋은 데 모시는 거 보조금 나오는 것도, 문화센터도.”p. 296


따뜻한 위로의 공감을 은유적으로 전하는 문장.

정빈의 손목에서 헌영의 시계가 헛돌았다. 헌영의 손목에 딱 맞게 불인 메탈 체인이었다. “안 잃어버릴 자신 있어? 나중에 클 때까지?” “응. 근데 차가워.” “기다리면 안 차가워질 거야.”p. 52

승화는 웃었다. 오래된 상처를 그 말들이 연고처럼 덮었다. 승화는 한마디도 믿지 않고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고마웠다. p. 357



직업을 바라보는 각자 다른 시선에 관한 이야기, 어쩌면 내가 그런 시선을 많이 받아서 일 지도 모른다. 모든 일은 노하우와 정성이 필요하고, 그런 것들로 완성되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직업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표현하고 있는 문장들이 좋았다.

그러면 한나의 자리에 또 다른 계약직 사서가 들어가서 처음부터 다시 같은 일을 배운다. 그게 무슨 낭비람, 한나는 책을 사랑하고 사서 일을 사랑했지만 한국에서 사서가 취급받는 방식을 사랑하진 않았다. p. 209

요즘은 아무도 큰 회사에서 평생 일하지 못하니 처음부터 틈새를 찾는 게 나을 것이다. 아름다운 틈새, 연모를 위한 틈새가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작은 집을 짓고 싶어. 연모는 생각했다. p. 318

“처음 좋아하게 된 걸 계속 좋아하지 않게 되어도, 다음 걸 또 찾으면 돼요.”p. 321

타이밍이 적절해야 한다. 너무 빨리 가면 유족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시간을 방해하는 게 되고, 너무 늦게 가도 유족들의 충격이 심해지기 때문에 몇 분의 차이지만 사려 깊게 하려고 노력한다. p. 339

작업환경을 측정하고 임시 건강진단을 하러 나가보니, 제대로 된 보호구도 없이 면 마스크만 덜렁 주어진 작업장이 적지 않았다... 중략... 누구도 그런 환경에서 일해서는 안 되었다. 설령 아주 강하고 건강한 사람이라도. 아주 잠깐 일하는 비정규직이라도. 현재는 산업재해 업무 연관성 소견서를 성심성의껏 썼다. p. 376


사람이 사는 곳에 늘 등장하지만 절대로 등장하지 말았으면 하는 사회의 많은 이슈들을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들려준다. 인문계열 대학의 통폐합, 의료인력부족, 가정폭력, 산업재해, 가습기 살균제, 불공평, 층간소음 등등 수도 없이 많은 세상의 문제는 우리 일상에 산재해 있고 주변에서 일어난다. 자연스럽고 거칠지 않게 소설에 녹아져서 우리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찌른다. 소설 속에는 나쁜 사람은 없고 나쁜 시스템만 존재한다. 서로를 찌르지 말고 진짜 무엇이 문제인지 살펴보라고 말하는 작가의 시선을 만나면 나도 정의로워진다.

가정폭력의 가장 나쁜 점 중 하나는 피해자가 갈 곳을 잃고 가해자가 집을 차지하기 쉽다는 것이었다. p. 263

좋은 기계가 한 대 들어왔다고 의사들이 줄줄이 잘리기도 했다. 병원이 어렵다고 접수계 직원들도, 주차요원도 반으로 줄였다. 계범은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p. 345

그렇게 해서 의료 서비스를 싸게 제공할 수 있는 거겠지만 정말 사람을 갈아 넣는 방법뿐인가, 현재는 자주 고민했다. p. 378


정리하다 보니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이 보였다. 그리고 무엇을 바꾸고 싶은지도 보였다. 50개의 단편, 그 이상의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은 그만큼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결국 내가 그 안에 서있게 만든다. 아마도 읽는 사람마다 다른 지점에 서 있지 않을까 싶다.  다양한 직업이 나오고, 그들이 사는 성실한 장소가 나온다. 직업만 찾아서 정리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번에 이 책을 읽을 마음을 먹은 것도 국어 수행평가로 문학 속 진로 관련 내용을 찾아 감상문을 쓰고 싶어 하는 학생에게 권해줘도 될까? 에서 시작되었다. 간호사가 되고 싶어 하면서 성실한 수행평가를 위해 책을 찾던 학생에게 좋은 책을 추천해 주고 싶었다. 읽어보니  매년 자의로 타의로 직업과 진로에 관한 책을 찾는  어떤 진로를 가졌던 아직 꿈을 가지지 않았던 미래를 고민하큰 학생에게 권해 주고 싶은 책이다. (책이 쪼끔 두꺼워서 나의 추천을 살짝 거부할 수도 있지만) 학생이 이 책 안에서 빛나고 있는 삶의 틈새를 찾을 수 있었음 하는 마음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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