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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Sep 02. 2021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화씨 451:레이 브래드버리:황금가지:2009

화씨 451은 책이 불타는 온도를 나타낸다. 책의 주인공은 몬태그라는 남자이다. 그는 책을 불태우는 일을 하는 소방수이다.  작가가 그려낸 세계는 미래의 어느 시점이며 책을 볼 수 없고 책을 보관하고 있거나, 읽는 사람의 집에 소방수들이 찾아가 불을 지른다. 책의 주인들은 책이 불타는 동안 잡혀가기도 하고, 책과 함께 불태워지기도 한다. 책에 등장하는 집은 불에 연소되지 않는 특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서 집에 있는 책을 불태워도 집은 불타지 않는다. 사람들은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 대신 텔레비전을 본다. 하루 종일 귀에 이어폰을 꽂고 라디오를 듣거나 수다를 떨며 생활한다. 끊임없이 대화는 한다. 그들의 삶에서 빠진 것은 책과 생각하는 시간이다.



자, 세상에 부족한 것은 세 가지가 있소.

우선 첫 번째, 당신은 이와 같은 책들이 왜 중요한지 알고 있소? 왜냐하면 이런 책들은 좋은 ‘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질이라는 건 과연 무슨 뜻인가? 내게는 짜임새를 의미하오.

좋은 질, 정보의 짜임새가 얼마나 좋은가.

... 중략...

두 번째는 뭡니까? 여가 시간이지. 생각할 시간.

p.137

-“세 번째 조건이 만족된다면. 첫 번째는 말했다시피 정보의 질이요. 두 번째는 그 정보를 소화할 충분한 시간이지. 그리고 세 번째는 지금 말한 두 조건의 상호작용으로 얻어지는 우리의 배움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권리요. ” p. 139

<파버 교수>


“‘사람들은 전부 자신이 죽을 때 뭔가를 남긴단다. 아이나 책, 그림, 집, 벽이나 신발 한 켤레, 또는 잘 가꾼 정원 같은 것을 말이야. 네 손으로 네 방식대로 뭔가를 만졌다면, 죽어서 네 영혼은 어디론가 가지만 사람들이 네가 심고 가꾼 나무나 꽃을 볼 때 너는 거기 있는 거란다. 무엇을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아. 네 손이 닿기 전의 모습에서 네 손으로 네가 좋아하는 식대로 바꾸면 되는 거란다. 그저 잔디를 깎는 사람과 정원을 가꾸는 삶과의 차이란 바로 매만지는 데 있지. 잔디를 깎는 사람의 마음은 전혀 정원에 있지 않지만 정원을 가꾸는 사람은 언제나 그곳에 있단다. ‘ 우리 할아버지 말씀이오.”p. 238



주인공 몬태그를 주위로 4명의 주요 등장인물이 나타난다. 몬태그보다 더 체제에 순응해서 살고 있는 몬태그의 부인 밀드레드, 모든 것을 알고 이 도시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라는 비티, 몬태그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가 문제가 있다고 느끼게 불을 지피는 소녀 클라리세, 그를 행동하게 만드는 파버 교수가 그들이다. 소설은 몬태그의 변화를 다루고 있다. 도시에서 정해진 규칙을 착실히 따르며 책에 불을 지르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던 몬태그에서 도시의 이상한 점을 깨닫고 '왜?'라는 의문을 품으며 파고들고, 마침내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가 찾은 것은 지금의 도시체제를 반대하는 무리들이다. 그들은 도시 밖에서 생활하고 있다. 도망자로, 농부로.


책을 읽고 있으면 어느 순간 이전에 읽었던 세 개의 소설이  떠오른다. 조지 오웰의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마가렛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가 그것이다. 조금씩 다르지만 디스토피아 미래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묘하게 닮은 네 소설의 속 세계는 묘하게 비슷하다. 방법은 다르지만, 사람들의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깊이 있는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게 한다. 공부를 하지만 사회 순응에 필요한 공부만 한다. 그리고 그들이 체제에서 벗어나는지 나지 못하는지 끊임없이 감시하는 도구들이 등장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감시기구와, 생각 없이 소통 없이 사는 삶에 적응한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너무도 비슷하여 깜짝 놀라게 된다. 화씨 451도 그랬다.


화씨 451에는 벽면 텔레비전과 하루 종일 귀에 꽂혀 있는 이어폰이 등장한다.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들은 사라지고 학교는 학생들에게 같은 이야기를 쏟아붓는다고 표현한다. 그들의 유흥거리는 텔레비전과 미친 듯이 질주하는 자동차의 스피드뿐이다. 대화는 나누지만 생각은 나누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어떤 거대한 권력이 우리를 조종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시작은 사람들이다. 책을 태워버린 것은 대중의 선택이었다고 한다. 그것조차도 작가의 환상이 만들어낸 무서운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모습 같다.


-“음, 그렇지만 그들도 나를 아쉬워하진 않는데요. 뭘, 내가 반사회적인 성격이래요. 사교적이지 않다나? 참, 이상하죠? 난 사실 굉장히 사회적이거든요. ‘사회적’이란 말은 사람마다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른 것 아니겠어요? 난 사람들하고 이런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야말로 사회적이라고 생각해요.”p.54

-이미 정해진 해답을 따라가기만 할 뿐이죠. 감옥의 이 방 저 방으로 옮겨 다니듯이 이 교실 저 교실을 네 시간이 넘도록 돌아다녀요. 선생님이 보여주며 설명하는 영화들을 보러 말이에요. 이런 데 함께 어울리는 것이 사회적이라니, 도대체 말도 안 돼요. 수많은 깔때기들을 들이대곤 커다란 물통의 물을 한 방울 남김없이 마구 쏟아붓는 거예요. 그리고는 우리더러 포도주를 주었노라고 하죠. p. 55 <클라리세>


반면 책의 내용을 줄줄 외우고, 이 도시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두 알고 있으면서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앞장서는 관리자 비티의 주장도 일견 고개가 끄덕여지는 지점이 있다. 무엇이 고개가 끄덕여지냐 하면 관리자들은 저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는 지점에서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다. 생각을 하지 않고 사실만을 알고 있는 사람을 관리하기가 훨씬 편하다. 두려움과 향락만 추구하는 인간을 감시하는 일이 '왜'라는 말을 내뱉는 사람보다 우위에 서기가 훨씬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흡사 이를 정당화하는 완벽한 논리를 갖추기 위해 책을 읽고 외운 것처럼 보인다. 또는 지식을 쌓다가 결국 그 모든 일에 환멸을 느낀 지식인일 수도 있다. 종종 그런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어 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내 앞에서 그렇게 말한다면 진짜 사람을 소외시키지 않는 건 비티의 주장이 맞지 않을까 하고 긍정해버리고 말 것 같다.


가족들은 그 애의 잠재의식을 부추겨 왔던 게 틀림없어. 학교 기록을 보면 확실하지. 그 앤 ‘어떻게?’가 아니라 ‘왜?’를 알고 싶어 했어. 정말 골치 아픈 일이지. ‘왜?’라고 의문을 품고 그걸 고집할수록 불행해지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야.

몬태그 평화라고. 경품 대회를 열어. 그래서 대중가요 가사나 수도 이름, 또는 아이오와에서 작년에 옥수수를 어떻게 재배했는지를 잘 외우는 사람한테 상을 주는 거야. 사람들한테 해석이 필요 없는 정보를 잔뜩 집어넣거나 속이 꽉 찼다고 느끼도록 ‘사실’들을 주입시켜야 돼. 새로 얻는 정보 때문에 ‘훌륭해’ 졌다고 느끼도록 말이야. 그리고 나면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고 움직이지 않고도 운동감을 느끼게 될 테지. 그리고 행복해지는 거야. 그렇게 주입된 ‘사실’들은 절대 변하지 않으니까.... 중략... 뭘 평가하고 등식화 한다는 것은 사람을 비인간적으로 외롭게 만드는 일일 뿐이라고. 난 그걸 잘 알지. p. 103


몬태그는 비티의 말에 현혹되지 않고 변한 마음을 따라 행동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을 만난다. 도시의 밖에서 책은 없지만 책을 외우고 있는 사람들. 책의 태우는 뜨거운 불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는 따뜻한 불빛에서. 그리고 다 함께 행동하려 한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은 행복하지 않다. 결국은 비극적인 결말이다. 모두가 살아남고, 변화를 갈망하던 주인공이 죽어버린 1984나 멋진 신세계와는 반대로 모두가 죽고 몬태그만 살아남는다.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내가 읽기로는 그랬다.) 그러나 몬태그는 함께 행동할 사람이 뒤에 있고, 우리가 변화시켜야 할 사람들이 저 도시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걸어간다. 나는 몬태그가 진짜로 누군가 살아있다고 믿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은 것 같았다. 그가 살아가기 위해서.


환상문학전집에 포함되어 있고, 오래전에 나온 책인 만큼 때때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는 책이었다. 나는 종종 나의 상상력의 빈약함을 느끼는데 이런 책을 읽을 때 그렇다.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 인물들 간의 대화는 이해가 가고 긍정하며 흐름을 따를 수 있었지만 상황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장 이해가 가지 않았던 부분은 그거다. 이 세계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몬태그가 사는 세상은 아주 작은 일부분의 도시이고 도시 밖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갑자기 밝혀지는 부분. 어쩐지 개연성이 없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1984, 멋진 신세계, 시녀 이야기 같은 책이 떠오른 때이며, 작가의 의도를 다시 한번 생각해본 시점이다. 작가들이 만들어 놓은 이상한 세계는 언제나 크지 않다. 그 작은 디스토피아 밖에는 그 세계를 반하는 무리들이 존재한다. 주인공들은 그곳에서 오기도 하고, 그곳으로 탈출하기도 한다. 그리고 깨어난 주인공들은 자신이 속하지 않았던 세상에 동질감을 느낀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가들은 왜 그런 공간과 사람들을 만드는 걸까? 아무것도 없이 혼자라고 느꼈던 주인공에게 갑자기 내려진 동료들이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일까? 통제된 풍요로운 작은 도시보다 더 큰 낙후되었지만 자유로운 공간이 시사하는 바가 무얼까? 안도? 작은 희망? 같은 것들일까. 그동안 다른 책이나 영화에서 보이는 낙후된 자유로운(?) 공간에 관해 의문이 들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든 걸 보면 래이 브레드버리가 독자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이런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차의 마지막은 '타오르는 불꽃'이다. 장작이 타오르는 주위로 모여있는 책을 머릿속에 넣은 사람들. 그 안으로 몬태그가 들어간다. 그리고 앉는다. 대화를 나눈다. 끊임없이 타오르던 분노와 두려움이 서서히 사라진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된다. 이 장면을 보며 그런 의문이 들었다. 같은 마음을 가진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이 사람을 살게 하는 걸까? 그런 마음을 작가는 전달해 주고 싶었던 걸까? 이미 죽었을지 모르는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고 살아 있다고 믿으며 걸어가는 몬태그의 모습에서 살고 싶다는 처절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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