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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Sep 10. 2021

요조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저: 양윤옥 역 :시공사:2018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 항상 바들바들 떨면서, 또한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의 말과 행동에 털끝만큼도 자신감을 갖지 못한 채, 그리고 나만의 깊은 고뇌는 가슴속 작은 상자에 감춰두고서, 그 우울과 긴장을 꼭꼭 감추고 감추며 오로지 천진한 낙천성만 있는 척 나는 장난꾸러기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갔습니다. p. 19


인간으로서 자격을 잃고 세상과 접접이 사라져 가는 요조의 삶을 읽는다. 태어날 때부터 죄의식을 무릎에 붙이고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없기에 두렵고, 그런 마음이 다른 사람이기에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을 표현하는 것도 어려워한다. 인간실격은 머리말, 첫 번째 수기, 두 번째 수기, 세 번째 수기, 후기로 이루어져 있다. 머리말에는 화자가 수기를 쓴 요조의 사진을 묘사한다. 화자는 처음 보는 남자의  세장의 사진을 설명한다. 잘생겼지만 어딘가 묘하게 거부감이 이는 남자아이에서 기괴하다는 표현을 쓰게 만드는 나이 든 남자로 변해가는 사진이다.


그리고 시작된 수기는 사진 속의 인물인 요조가 화자이다. 막연히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겉과 다른 자신의 속 모습이 발각될까 떨던 어린 시절. 도쿄로 와서 새로운 인물들을 만나며 다양한 인간과 사회를 알게 된 시기. 자신을 포함한 인간을 향한 슬픔과 불신, 세상에 향한 낙망이 쌓여서 갈수록 수렁으로 빠져드는 시절.  세 개의 수기로 나뉘어 기록된다. 마지막 목차인 '후기'에는 머리말에서 사진을 보던 화자가 등장한다. 화자는 '요조'라는 인물을 만나적이 없으며 사진과 그가 기록한 수기만을 읽은 사람이다. 이를 전해준 사람에게 화자는 말한다. 요조는 정말 나쁜 사람 같다고 당신도 이 사람과 엮여서 힘들었겠다고 말이다. 그 말에 수기를 건네준 사람은 말한다.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센스도 있고, 하느님같이 착한 아이였다'라고 말이다. “그 사람 아버지가 나빴어.”라고 말이다.


지난해에 '인간실격'을 읽었다. 일본 고전 소설을 거의 읽어보지 않았었는데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난 직후에 '인간실격'이라는 제목이 '이방인'의 주인공과 연결되는 듯하여 손이 갔었다. 그때 기록한 내용을 보면 인간이 사는 사회의 테두리 안을 견디지 모하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밖으로 밀려나는 두 주인공 이방인의 뫼르소, 인간실격의 요조에서 보이는 나와 비슷한 지점을 이야기한다. 그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습에 공감하고 그들을 머리에 넣고 비슷한 나락의 끝까지 갔다가 다시 현실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와 안온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사람 아버지가 나빴어, 그는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었어'라는 말에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을 가부장제 사회와 연결시켰었다.


'소통과 공감의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동네 도서관에서 줌으로 하는 고전문학 독서토론의 세 번째 책이 '인간실격'이었다. 두 번의 독서토론 이후 강사님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고나 할까? 원래 같은 책 두 번 읽는 걸 싫어하는데 읽었던 분들도 꼭 다시 한번 읽어보라는 말에 홀린 듯이 다시 처음부터 정독했다. 이전에는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읽었다면 이번에는 '인간실격'의 토론 주제로 선생님이 뽑아주신 세 가지 주제를  염두에 두며 읽었다.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못하는 인간의 내면, 소통의 결여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인간의 나약함을 어루만지는 소통과 공감의 힘'이 그것이었다.


읽어가는 동안 '요조'라는 인물이 타인과 소통을 하려 하는가를 찾아보려 했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요조는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끊임없이 내면의 어떤 것을 찾아 헤맬 뿐, 외부의 누군가와 깊이 있게 소통하려고 한 흔적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읽다 보니 마지막에 타인의 입을 통해 나오는 "그 사람 아버지가 나빴어."가  다시 보였다. 이전에는 뒤통수를 치는 반전으로 감수성이 풍부한 어린아이에게 가해진 무관심과 가부장적인 억압으로 인한 희생양처럼 보였던 요조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었다. 이번에는 그 말 자체가 변명처럼 보였다. 부모님의 역할이 부족하다 보니 잘못되었을 수 있지만, 그것만의 문제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마지막 문장을 읽어도 들었기 때문이다. 요조에게는 여러 번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이를 통해 변화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마다 비합법과 음지를 발견하며 세상에서 뒷걸음질만 치고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세상’이란 게 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형일까요? 어디에 그 세상이라는 것의 실체가 있을까요. 아무튼 막강하고 살벌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그래도 호리키의 그 말을 듣고는 나도 모르게 “그 세상이라는 건 바로 너지?”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오려고 했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내뱉지 않았습니다. p. 102

-그리고 세상이나 세상 사람이라는 건 어느 한 개인이라고 생각한 뒤부터 나는 그때까지 보다 조금은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p. 103


요조는 겉과 속이 다른 자신,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 결국 돈이 필요해 작아지는 자신의 모습을 어리석고 나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인간이 만든 세상의 합법과 도덕은 그가 이해하기 힘든 답답한 올가미 같은 것이다. 당연하게도 나쁜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터놓지 못한다. 그런 요조가 유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순수함이었다. 앞 뒤가 모두 같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이제는 그런 순수함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여러 가면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쓰는 이른바 꼰대가 되어 버린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조금 답답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가 찾은 순수함은 언제나 그렇듯 변질되고 오염된다. 그럴 때마다 그의 좌절은 깊이를 더해간다. 그런 요조의 모습에 나의 실망도 더해갔다. 여기서는 선생님이 던저준 주제의 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강연의 내용은 작가 소개부터 시작되었다. 작가를 소개하고 시대상과 데카당스 문학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진 책을 읽은 소감, 요조의 익살맞음, 인간실격, 요조를 둘러싼 인물들에 관한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2시간이 넘어서 까지 이어졌다. 지난 두 번의 경험을 통해 선생님이 가지고 오는 화두도, 회원들의 독서력의 깊이에도 놀라곤 했었다. 내가 보지 못한 부분, 보고도 지나쳤던 부분들에 관한 통찰력과 깊이 있는 생각들에 뇌가 새롭게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한 사람이 쓴 수기를 읽고 대화를 나누니 자연스럽게 '요조'라는 인물에 관해 요모조모 탐구하게 되는 것이다. 각자의 경험에 비춰 읽어진  '요조'는 딱 그만큼 다른 사람이었다.


요조가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지점을 보는 관점이 달랐고, 그가 소통을 했는지 하지 못했는지 안 했는지에 관한 생각도 달랐다. 이야기를 들으며 이렇게 다른 경험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구나를 새삼 깨달았다.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언제나 내가 편하기 위해 나의 경험과 생각으로 타인을 쉽게 재단하고 있었다는 것을 절절하게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 순간 이것이 오늘의 선생님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며 '요조의 소통'에만 집중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우리 모두가 제대로 상대방을 보고 소통하려고 하지 않고 있었고, 이 프로그램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구나 생각했다. (선생님의 진짜 의도는 이게 아닐 수도 있지만 그 순간에는 내가 선생님의 의도를 제대로 찾았다고 혼자 생각하며 컴퓨터 화면 속의 선생님에게 긍정의 눈빛을 보냈다. 그 순간 나는 어느 누구의 마음도 사실은 모르는 게 아닐까에 관한 심각한 고찰에 빠져 있었고 지금도 타인에 대해 겸손해지는 마음을 가지려고 하고 있다.)


아버지에게 호소해도, 어머니에게 호소해도, 순경에게 호소해도, 정부에 호소해도, 결국은 처세술 뛰어난 사람들이 세상에 그럭저럭 통할 만한 변명만 늘어놓을 것이다. 틀림없이 한쪽으로 치우칠 게 뻔하다. 어차피 인간에게 호소하는 건 아무 소용없다. 나는 단 한마디도 사실대로 말하지 못한 채 꾹꾹 참으며 그렇게 광대 짓이나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뭐야, 인간에 대한 불신을 말하는 거야? 흥, 네가 언제부터 크리스천이 되었어?” 어쩌면 그렇게 비웃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인간에 대한 불신이 곧 종교의 길로 통한다고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그렇게 비웃는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인간은 서로에 대한 불신 속에서 여호와고 뭐고 전혀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살아가는 거 아닌가요? p. 26

  하지만 그건 그저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로 사기를 치면서도 다들 이상하게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 속이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실로 훌륭한 그야말로 맑고 밝고 명랑한 불신의 사례가 인간의 삶에 가득한 것입니다. p. 28

그러니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도회지 건달을 본 것이었습니다. 나와는 또 다른 형태로 역시 이 세상 사람들의 삶에서 완전히 유리되어 어쩔 줄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만은 분명 똑같은 부류였습니다. p. 48


요조는 결국 '세상 사람들의 삶에서 완전히 유리되어',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간다'라는 마음만을 간직한 시점에서 수기를 끝맺고 지인에게 이 수기를 보낸다. 이 또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마음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으로서의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을 잃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아직 여기에 관한 해답은 찾지 못했다. 아마도 평생에 걸쳐도 '정답'이라고 할 만한 것은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다만 이전의 화씨 451에서부터 계속 나를 따라다니는 '깊이 있는 대화와 생각은 무엇일까?'에 관한 약간의 힌트를 찾은 기분이다. 읽고, 쓰고, 말하는 행위가 자신 안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혼자서 하는 읽고, 쓰고, 말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을 나누는 일은 '요조'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순수함(겉과 속이 일치하는)으로 향하는 방법에 기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대화의 밤이었다.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요조와 같이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도망치는 사람을 옆으로 데리고 와서 깊이 있는 대화를 함께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방법에 관해서는 약간의 실마리도 잡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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