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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Sep 16. 2021

내가 글 쓰는 걸 멈출 수 없는 이유

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작가정신

나는 돌잔치를 하지 않았다. 대신 돌을 맞은 그날 찍은 사진에 젊고 멋진 삼촌이 함께 있다. 엄마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막냇동생이었는데, 내가 한참 클 때까지 삼촌은 푸르렀다. 반듯하고 푸르게 시린 삼촌을 동경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큰 지원 없이 열심히 공부해서 소위 말하는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 가정을 이룬 삼촌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누이에게도 자랑이었다. 엄마는 삼촌이 어떠했다, 어떻게 하고 있다 같은 말을 자랑스레 자식들에게 종종 했다. 사촌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모나 사촌들이 막내 삼촌을 바라본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삼촌이 결혼을 하고 멀리 이사를 가면서 만나는 일이 줄었다. 그러다가 내가 취업 면접을 보러 가는 지역에 삼촌이 살고 있어 며칠 삼촌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취업을 앞둔 삼촌의 푸르렀던 시절과 비슷한 나이가 된 내가  삼촌을 오랜만에 만난 것이다. 없는 살림에 공부도 하고 돈도 벌면서 누이와 누이의 조카들까지 챙기던 삼촌은 가정을 꾸려가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대기업에 다녔던 삼촌은 내가 잠에서 깨기도 전에 출근을 했다. 나는 숙모와 사촌들과 하루를 보냈다. 저녁을 먹고도 삼촌은 퇴근을 하지 못했다.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늘 있는 일인지 내가 와서 인지 알 수 없으나 숙모님이 야식으로 피자를 시켜주셨다. 모여 앉아 피자를 먹고 대화를 나누었다. 피자를 다 먹어갈 때쯤 삼촌이 돌아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가족들은 먹던 피자를 정리하고 인사를 하고 각자 잠을 자러 방으로 들어갔다.


그 장면은 오랜 시간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으며 다시 떠올랐다. 시골에서 나고자란 나에게 그 광경이 무척 생경했었다. 마치 집이라는 곳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과 비슷한 기분이라고나 할까. 우리 집은 농사를 지으니 두 분이 함께 일을 하셨고, 해가 지면 집으로 들어오셨다. 밤마실이나 약속으로 나가는 경우는 있어도 출근해서 퇴근시간까지 부재한다는 개념은 그때까지 내 안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도 깨지 않는 새벽부터 모두가 잠자리에 드는 늦은 시간까지 지속되는 가족의 부재는 낯설었다. 삼촌이 오기 전까지 이루어지던 대화는 삼촌이 도착하면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사라지는 것에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가족들은 남편에게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기다린 것일까? 아니면 가장이 왔으니 이제 우리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자는 마음이었을까? 무엇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아니었다.


삼촌은 새벽에 나가서 영어수업을 듣고 출근하고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해야 했다. 근데 그건 내 삼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많은 직장인들이 똑같이 살고 있었다. 회사의 의지가 80퍼센트 이상되는 영어수업을 꼭 들어야 했고, 회사일이 넘치고 흘러 늦은 시간까지 야근은 필수다. 가족들과는 퇴근시간에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나누는 게 전부. 종종 일찍 퇴근하는 일도 있을 것이고,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승진을 하면 기뻤을 것이다. 통장에 들어오는 월급과 그 월급을 기반으로 만들어낸 돈으로 물건을 사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 삶의 활력에 공헌을 했을 것이다. 때로는 친적, 친구들과 만나 술도 한잔하고, 대화를 나누며 일상의 여유로움을 누렸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은 커갔을 것이다. 나도 그때의 삼촌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피자를 먹다 정리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 받았던 기이한 마음 같은 건 잊고 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두 가지 사항을 모두 고려하여 결혼했다. 하나는 그런 여성을 얻음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시에 높은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p. 34

-그러나 거부와 불평에 부딪히면 즉시 자신만의 세계인 공무에 파묻혀 거기서 보람을 찾았다. p. 37

-공무를 수행하며 느끼는 기쁨은 자존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고, 사교생활을 하며 느끼는 기쁨은 허영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 이반 일리치가 진정으로 기뻐할 때는 브리지 게임을 할 때였다. 그에게는 모든 것, 인생에서 제아무리 불쾌한 일을 겪은 후라도 다른 모든 것을 빛처럼 환하게 비추는 낙이 있었는데 그것은 투덜대지 않는 좋은 상대와 함께 브리지 게임을 하는 것이었다. p. 51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이런 삶에 대해 흠칫하며 돌아보게 한다. 소설은 이반 일리치가 죽어 상가가 차려지고 그곳에 그의 동료들이 오는 부분에서 시작된다. 다음 장에서 이반 일리치가 살아온 삶이 시작된다.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이반 일리치의 성장과 성공, 갑자기 시작된 원인모를 통증으로 이어진다. 그는 자신보다 높은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계단을 밟아 올라간다. 자신에게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정도의 월급을 받기 위해 이직을 하고 일을 하며 만족스러워한다. 때로 힘들고 지치지만 편안한 사람들과 브리지 게임을 함으로써 잊을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파멸의 끝자락에 서서 이해하고 동정해주는 사람 없이 외롭게 버텨야 했다. p. 66


그런 그에게 문제가 생긴다. 배에서 시작된 통증은 그의 일상을 갉아먹으며 크기를 부풀린다. 통증은 가족과의 관계를 망가뜨리고, 직장을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만든다. 결국에는 움직일 수 없게 하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고통이 시작되면서 그는 날카로워졌고, 모래성으로 만들어진 줄도 몰랐던 관계들이 스르르 흩어지기 시작한다. 그는 아팠고, 외로워졌다. 그러니 생각할 시간만 많아진다. 왜 아프게 되었는지, 그들은 왜 자신을 외롭게 만드는지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는 계속 말하지만, 무얼 하면 괜찮아질지를 찾지 못한다.


-그는 나락에 떨어졌다. 나락 끝에서 뭔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묘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건 기차여행을 할 때 기차가 앞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뒤로 가고 있고, 그걸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정확한 진행방향을 알게 되는 것과 비슷했다.

“맞아, 전부 그게 아니었어.”라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하지만 괜찮아. 잘하면, 잘하면 ‘그걸’ 할 수 있어. 근데 ‘그게’ 뭐지?”그는 자신에게 묻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p. 121


삼촌은 모든 순간이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많은 순간 행복했을 것이고 지금도 잘 살고 계신다. 그냥 그날 피자를 먹고 잠자리에 드는 순간 내 기준에서 '가족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하나 가 생겼었다.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지 못하고 어느 순간 잊어버렸었다.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똑같이 만들어진 집에 들어가서 비슷비슷한 생활을 하는 생활에 익숙해졌다고나 할까. 그러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으며 '가족이란 무엇인가'라고 내가 나에게 던졌던 질문은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반 일리치는 생의 끝자락에서 돌아보며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었는지 생각해본다. 부유한 생활, 명예, 부인과의 결혼 등을 떠올려보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온 기쁨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어서 예전에 도저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것, 즉 자기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어쩌면 윗사람들이 좋은 것이라고 여긴 것에 대항하려 했지만 즉시 떨쳐버리곤 했던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의도, 이런 게 어쩌면 참된 것이었고 나머지는 죄다 거짓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직무, 삶을 살아가는 방식, 가족, 사교계와 직장의 이해관계, 이 모든 게 거짓일 수도 있었다. 그는 눈앞의 이 모든 것들을 방어하려 들었다. 그러나 갑자기 방어하는 대상의 허점들이 속속들이 느껴졌다. 그러자 더 이상 방어할 수 없었다. p. 117


이반 일리치는 죽음의 순간 잘못되었다고 느꼈지만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지 못한 채 죽는다. 그리고 다시 제일 첫 장에 등장하는 이반 일리치의 상가에 모인 일리치의 동료들을 생각해보면 여전히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아프기 전의 이반 일리치와 똑같은 삶을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반 일리치가 아플 때 그들이 이반 일리치와 눈을 마주치고 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줬다면 어땠을까? 이반 일리치가 몸과 마음의 고통에 관해 진솔하게 타인과 나눌 의지나 용기 따위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어리석은 인간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채 이반 일리치와 똑같은 기차를 타고 가고 있다.


이 책의 가장 무서운 지점은 그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동료도 가족도, 이반 일리치를 진료하는 의사들도 이전 사람들이 옳다고 한 길을 그대로 답습하며 어딘가로 가고 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그래서 죽는 순간에도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럴 때마다 나는 지금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어떤 계기가 생긴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나의 생각을 정리해서 누구에게 보이는 일은 혼자 쓰고 보는 일기와는 다르다. 남에게 보여주는 글 속의 나는 생생한 날 것의 나는 아니다. 조금 더 생각하고 고민하다가, 치졸한 내가 아닌 되고 싶은 나에 가깝게 쓰게 된다. 돌아보고, 되고 싶은 나를 계속 만나다 보니 어느새 그런 내가 되어 있는 듯할 때가 있다. 이반 일리치는 죽기 직전에 기차의 방향을 고민했지만 글을 쓰면서 나는 계속 지금 내가 타고 있는 기차의 방향을 생각해보고 있다. 때론 힘들고 하기 싫어질 때도 있지만, 정리된 글을 계속 써보는 일을 그만 두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내 삶을 만들어 가는 일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쁘로스찌(용서해줘)라고 한마디 더 덧붙이고 싶었지만 ‘쁘로뿌스찌’(보내줘)라고 말하고 말았다.,,, 그러자 돌연 모든 것이 환해지며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며 마음속에 갇혀 있던 것이 일순간 밖으로, 두 방향으로, 열 방향으로, 온갖 방향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가족들이 모두 안쓰럽게 여겨지고 모두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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