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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Oct 14. 2021

듣고, 읽고, 목소리를 낸다면

불과 나의 자서전. 김혜진 지음;현대문학;2020

주인공 ‘홍이’에게 상징적인 장소가 철거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불과 나의 자서전’은 30대의 홍이라는 인물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공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책의 처음에 한 줄로 표현된 철거되는 장소는 남일동에 있는 ‘제일약국’이다. 그리고 다시 홍이의 이야기는 ‘제일약국’이 철거되기 전으로 돌아간다. 


30대 홍이의 집은 ‘제일약국’이 있는 남일동이 아니다. 홍이의 집은 중앙동에 위치한다. 그러나 홍이는 자신의 만성적인 알레르기 치료제를 구입한다는 명목으로 ‘제일약국’을 자주 들른다. 그리고 앉아있다. 비타민 드링크제를 마시며. 그러다가 이제 막 남일동으로 이사 온 주해를 만난다. 주해는 이혼 후 7살 난 딸아이와 남일동으로 이사를 왔다. 그날은 지나던 길에 화장실 급한 아이가 약국의 화장실을 쓸 수 있을까 하여 들른 것이었다. 그 이후로 다시 약국에서 만나면서 홍이와 주해는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이웃이 된다. 


중앙동의 홍이와 남일동의 주해는 이웃이 될 수 없다. 동네가 다르다. 그러나 홍이는 언제나 길하나 건너면 있는 남일동으로 넘어와서 시간을 보낸다.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곳이 이곳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홍이는 어린 시절 남일동에 살았었다. 그러다가 부모님이 구입한 집이 중앙동이 되면서 중앙동 주민이 되었다. 그때부터 홍이는 남일동과 중앙동의 경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경계의 삶은 30대가 된 지금까지 이어진다. 


50대 중반의 남자 약사가 직접 제조하는 알레르기 약기 꽤 효험이 있는 편이었고, 오가는 사람이 드문 데다 아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유일하게 편안함을 느끼는 곳이었습니다. 

알레르기는 약 먹는다고 고쳐지는 병이 아닙니다. 마음을 편하게 먹어야 나아요. p. 31


홍이는 현재 실직상태이다. 중앙동에 있는 부모님이 사는 집에 살며 회사 다닐 때 모아두었던 돈을 다 까먹고, 부모님의 용돈을 받으며 생활한다. 홍이가 회사를 그만둔 이유는 무엇일까? 회사에서 따돌림을 받던 직원을 편 가르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하면서 홍이의 고단한 회사 생활이 시작되었고, 따돌림 받던 직원이 그만두자 새로운 따돌림의 대상이 홍이로 바뀌었다. 그리고 홍이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때부터 홍이는 알레르기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홍이는 다시 회사를 다닐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알레르기를 치료하며 집에 있었다. 


그런 나날 속에서 주해를 만난 것이다. 주해는 홍이가 예전에 살았던 남일동으로 이사를 왔다. 남일동은 중앙동 사람들이 편 가르는 곳이며 남일동 주민들 스스로도 변변치 않은 곳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동네이다. 그런 공간이 주해가 오면서 차차로 바뀌어 간다. 어두웠던 길에 가로등이 생기고, 마을버스가 들어온다. 홍이는 그런 주해를 보며 어떤 희망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해내지 못한 것들을 주해가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밤 나는 정말 없애고 싶었습니다. 한 사람 안에 한번 똬리를 틀면 이쪽과 저쪽, 안과 밖의 경계를 세우고, 악착같이 그 경계를 넘어서게 만들던 불안을. 못 본 척하고, 물러서게 하고, 어쩔 수 없다고 여기게 하는 두려움을. 오래전 남일동이 내 부모의 가슴속에 드리우고 나에게까지 이어져왔던 그 깊고 어두운 그늘을 정말이지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p. 168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했고, 선택에는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며, 그 결과에 책임을 다하는 것만이 지금의 상황을 바꿀 있다고 믿는 사람 특유의 긍정성과 단순함,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추진력과 실행력이 주해에겐 있었습니다. p. 45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주해에게서 보이는 것은 홍이 자신의 엄마의 그림자이다. 엄마가 억척스럽게 정착하고 싶었던 이유와 주해의 걸음걸음이 어쩐지 겹친다. 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중앙동과 남일동의 경계도, 사람간의 경계도 ‘희망’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도 달라지지 않았음에 홍이는 분노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홍이는 남일동에 불을 지른다. 그렇지만 그 불조차도 작은 개인의 소동으로 그치고 만다. 


자르고 나누는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지역을 자르고 나누는 일은 결국 사람간의 관계를 자르고 나누는 일로까지 이어진다. ‘저 동네 사람들이 다 그렇지’, ‘저런 사람은 원래 저래.’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홍이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나타난다. 그러나 주해는 말한다. ‘그게 내가 아니라 내가 사는 중앙동을 염두에 둔 말이라는 것을, 그게 네가 남일동에 살았다고 해도 그렇게 모든 것을 명명백백하게 따질 수 있느냐는 질문이라는 것을, 나는 시간이 훨씬 더 지난 뒤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p. 139’라고 말이다. 


‘불과 나의 자서전’을 읽으며 나도 홍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경계에 머물며 경계를 허물지는 못해도 그 경계를 의식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서는 홍이의 부모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자식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경계를 넘어가고 경계의 바깥쪽에 있는 사람들을 배척하는 마음을 가진 소위 어른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미 된 것은 아닐까. ‘불과 나의 자서전’은 대화가 많이 등장하지만 그 대화들은 마치 지문처럼 나온다. 한 번의 쌍따옴표, 홑따옴표도 없다. 처음에는 갸웃하다가 문득 이 모두는 내안에 있는 모든 것이라는 표현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경계의 밖에 있다가 안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경계 안에 들어와서도 머뭇거리기도 한다. 또, 지금의 안이 아니라 또 다른 경계 안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나’도 있고, ‘그냥 이대로가 좋아‘라고 말하는 나도 있다. 제일약국의 약사도, 주해도, 주해의 딸도, 홍이의 부모님도 그리고 홍이까지도 모두 나이면서 타인이다. 우리는 그렇게 나누고 자르며 살아간다. 그렇게 나누고 자르면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 모두에게는 경계를 나누는 칼이 쥐어지기도 하고, 그 칼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의도를 가지고 행해지진 않았으나 말과 감정으로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있다. 


부모의 감정이란 언제나 더 부풀려지고 또렸해져서 아이들에게 가닿는 법이니까요.p. 24


자르고 나누는 행위는 비단 공간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연령대, 직업, 학벌 등 무궁무진하다. 어쩌면 사회라고 이름  여진 인간이 사는 세상이 존속하는 한 이러한 일은 계속적으로 생겨날지도 모른다. 다른 공간, 다른 시대, 다른 직업, 다른 학교를 나왔다는 것은 서로가 경험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한 것이 다르면 생각하는 방법도 다를 수 있다. 다르다고 해서 높다란 담을 쌓아 경계를 만들거나, 나와 다른 것을 부숴버리고 나와 같이 만드는 것은 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읽고 이해할 수 있다. 책이나 시대 상황만이 아니라 타인의 감정까지도. 그러니 결국 작은 공간을 태우고 사그러질 뿐이라 하더라도 계속되어야 한다. 홍이와 주해처럼. 홍이처럼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함께하기 위한 노력과 주해처럼 나를 위한 목소리를 내는 노력이 계속적으로 이어진다면 상처가 없어지진 않겠지만, 알레르기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겠지만 더 많이 아프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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