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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ly Jun 13. 2023

채호기 시집 <수련>



1. 타나토스와 에로스     


‘타나토 노트’라는 장편소설이 있다. 타나토는 그리스 신화의 타나토스(thanatos)에게서 따온 것으로 파멸과 죽음을 의미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보다 타나토스란 단어를 먼저 끌어다쓴 사람은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타나토스란 소멸 본능 내지는 죽음 본능이라 부르는 개념과 대략 일치한다. 반면 에로스는 잘 알려진대로 성적 본능을 포함한 생명지향적인 욕망이다. 많은 문학 작품들이 에로스-타나토스 관련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대개의 경우 개념 자체를 형상화하는데 그치는 반면 채호기의 시에서는 이들 개념이 원래의 도식적인 이분법을 넘어 선(先) 타나토스->후(後) 에로스의 형태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방식은 그 자체로서 에로스의 현세성과 타나토스의 내세성을 초월한 제3의 세계, 다른 차원으로 가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손바닥에 너의 두 눈

내 눈을 빼고 그걸 끼운다.

코와 입 귀를 지우고

너의 코와 입 귀를 덮는다.

머리카락을 뽑고

너의 머리카락을 씌운다.

부풀어오른

유리잔처럼 매끄러운 가슴에

커피향의 젖꼭지가 돋아난다.

부숭한 털을 깎아내고

잘 구운 빵에다

우유빛 크림을 바르고

얇게 초콜릿을 덮는다.

너의 맛있는 살갖처럼.    

 

[...]     


너를 연기하려는 게 아냐.

네가 되어 너의 삶을 살아가는 거지.     


(슬픈 게이, 슬픈 게이)     


이제 여기에 그는 없고 무덤을 열고 걸어나온 그녀의 주검만이 삶의 싱싱함으로 살아돌아온다. 존재론적 의미에서 '나의 죽음=너의 남은 삶'이 되는 순간이다. 채호기의 시에서는 이렇게 내가 죽어 너 혹은 다른 사물과의 일치를 이루려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포인트는 말할 것도 없이 타나토스, 즉 죽음이다. 시인은 죽음을 거치지 않고서는 타자 혹은 다른 생물 무생물과의 경계를 해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때의 죽음은 주로 스스로의 몸을 허무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죽음은 몸을 허문다

...

죽음 너머에 있는 몸?     


(죽음, 지독한 사랑)     


나 그대 몸 속으로 들어가려면

죽음을 지나야 한다는 것 그 때 알았네    

 

(몸 밖의 그대2, 지독한 사랑)     


찬장머리 농 손잡이 문 손잡이 의자등 계단 난간

이것들이 다 내 몸이니까요,

그대여 내 몸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다면

어떻게 저들을 깊이 알 수 있었을까요.

저 혼자 온전했다지만 목발 짚은 시간들 많았는데요.   

  

(나는, 지독한 사랑)     


죽음의 저 편 언저리 같은 내 몸에서 물줄기로 뿜어나오는

너의 푸른 다리가 풀기둥처럼 뻗어나가 공기를 자르고

내 머리카락 희어지는 끝에 환한 꽃 같은 너의 얼굴

들어봐도 나는 보이지 않겠지만

나에서부터 너의 삶은 시작되고

너에게로 빛나는 生들을 쏘아올리는

내 몸은 네 삶의 그루터기이니......     


(내 몸은 네 삶의 그루터기, 슬픈 게이)     


내 몸을 먹고 네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너는 모르는구나

내가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을     


(북극의 얼음, 슬픈 게이)     


왜 반드시 죽음을 거쳐야만 하는 걸까. 나를 이루고 있는 육신이나 자의식 같은 장애물들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타자와의 완전한 합일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완전한 합일이란 너의 차원으로 옮아가 너와의 -존재의 흡수와도 같은- 의사소통을 이루어내는 데 있다. 그것은 자기 생의 근본을 바꾸려는 '모든 혁명가의 활주로' (너의 입술, 밤의 공중전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를 소멸시켜 네가 되려는 시도가 정말 가능한 것인가. 실험을 거치지 않은,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설정은 아닌가.    

 

내가 너에게 가려면 매번 달리는 기차를 건너가야 한다.

나는 달리는 차창에 수도 없이, 달려드는 나를

비춰볼 뿐, 너와 내가 숨가쁘게 달리고 있는 건널목에

밤거리처럼 요란한 기적이 한 순간 정지 화면처럼 이

生의 필름을 차단시킨다.

여전히 철로 건너편에서 너의 몸은     


(건널목, 밤의 공중전화)     


슬픈 게이의 그는 자신이 그녀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상식적으로 이는 불가능하다. 그는 전에 존재했던 그 여성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와 그녀 사이에는 기차가 끊임없이 달려드는 건널목이 존재하고 있다. ‘정지 화면처럼 요란한 기적이 생의 필름을 한 순간 차단시킬 때’ 얼핏 너를 볼 수 있을 법한 실마리를 제공할 뿐이다. 정신을 차려보면 여전히 너의 몸은 철로 건너편에 있다. 환각과도 같은 이 한 순간을 포착해내는 것은 예술가의 몫이다. 시를 통해 그 한 순간은 이승과 저승, 너와 나라는 이분법적 구도 사이 제3의 공간과 장소가 된다.          



2. 절망과 희망     


‘깊은 잠처럼 달디단 체념은 어둠보다도 캄캄하고, 단단하다(꿰뚫고 나아가다 - 몽염12, 지독한 사랑)’.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절망과 희망 사이를 넘나들지만 절망에 대처하는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절망이 희망으로 저절로 바뀔 때까지 내버려두기도 하고 기분전환이라는 진통제를 복용하기도 한다. 기분전환이 진통제인 까닭은 절망의 근원적인 환부는 건드리지 못하고 적당히 무뎌지게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얄팍한 대응은 채호기에게는 절망과 타협하는 길일 뿐이다. 그래서 절망 앞의 체념은 달디 달다. 그러나 진정으로 절망과 맞서기란 물론 그 자체만으로도 힘겨운 투쟁일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정보가 넘쳐나고 보고 싶지 않아도, 듣고 싶지 않아도 온갖 말들과 이미지가 뇌 속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것들은 어느 틈엔가 우리 속으로 파고 들어와 '너무 깊이 빠져들지 말고 적당히 일상과 타협할 것을' 종용한다. 절망의 근원을 파헤치는 행위는 외롭고 힘겨운 싸움이지만 일상과 타협하는 것은 하루를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망의 입구만 맴돌다가 돌아오고, 또 돌아온다. 죽을 만큼 열심히 사는 사람은 죽기 직전인 사람들 말고는 흔치 않다. 죽음 가까이 있는 삶이란 '타협 너머에' 있는 삶, '너무 멀리 가버려' 돌아오기 힘든 삶이다. 이러한 자기소멸적 순수는 스스로를 겨누는 칼날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치열함은 많은 예술가를 요절하게 만들고 임계점을 넘은 깊이에의 추구는 사람에게 치명적인 상흔을 입힌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희망을 찾아야 할까. 정과리는 '슬픈 게이'의 평 '죽음 이후의 네 생'에서 한국인의 전통적 희망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거자필반 회자정리'란 현재는 부재중이라도 후에는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마음이다. 이런 소박한 바람이 슬픔과 고난 속에서도 한국인의 삶을 지탱해준 한 가닥 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채호기는 그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도 철저하게 배신한다. 「그의 시에서는 삶이 곧 죽음이므로 그 자체로서 부정인 긍정이며, 삶을 담보로 한 죽음의 연출이거나, 죽음을 엇비치는 삶의 하위이거나, 그 모든 감춤 혹은 가장의 마지막 베일을 걷어내 버리는 것이다. 남겨진 것은 '폭로된 감옥! 폭로된 응혈!' 뿐이며」-정과리, 죽음 이후의 네 생, 슬픈 게이, 1994- 그 결과 행복 혹은 비극에 대한 욕망마저 완전히 차단된 어떤 세계가 도래한다. 말 그대로 '지독한' 자세가 아닐 수 없으며 그의 시의 양태들 역시 독자들이 '시가 어떠어떠해 주기를' 바라는 바에서 다소간 어긋나는 점이 있다. 바로 그런 점이 시를 읽는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다. 틀 안의 아픔, 제도권 안의 아픔은 더 이상 아픔이라 볼 수 없으므로 이것 역시 하나의 계산된 치밀성일 것이다. 시인의 치열함은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눈을 떠라! 무지막지한 힘이 밧줄에 걸린 내 목을 죄어올

때 붉은 고깃덩이처럼 혀를 입 밖으로 늘어뜨리지 말고 생선

꼬리처럼 허공을 퍼덕여 한마디 욕이라도 뱉아라! 눈을 감

고 이게 꿈일 거라고 무너지며 안간힘쓰지 말고 차라리 내

손으로 내 목의 밧줄을 잡아당겨라! 그리고 비명을 질러라!

그 비명이 오래된 먼지를 깨우고, 풀잎을 깨우고, 꽃잎을 깨

우고, 담쟁이덩굴을 깨우고, 벽돌을 깨우고, 공기를 깨우며

질주하다가 서서히 육체를 갖기 시작한 후, 그 몸 속에서 이

는 조그만 생명의 불꽃을 내가 즐거이 바라볼 수 있을때까지.     


- 뒤돌아보다 -몽염10, 지독한 사랑


     

3. 수련     


이렇게 해서 내질러진 비명이 수련꽃이 된다. 나를 부정하고 허무는 과정에서 나는 네가 되기를 원했으나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았다. 그러나 '그대가 되어 내 나머지 삶은 없는 것으로 하리 실패할 때마다 내 몸의 한 부분을 잘라버리며 불구로 이 세상 모든 삶을 부랑' 하려던 그때 '머리에 플래시가 터지고 동공의 초점이 열렸다 닫히면서‘ '뜨거운 화인의 말'이 태어났다. 말, 또는 시, 그것은 예술, 또는 나와 너의 접붙임 과정에서 생겨난 제3의 창조물이다. 시인은 이것을 수련이라는 꽃으로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수련은 그 특성상 공기와 물의 중간에서 피어나는 꽃이기 때문이다.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사랑의 피부에 미끄러지는 사랑의 말들처럼     

수련꽃 무더기 사이로

수많은 물고기들의 비늘처럼 요동치는

수없이 미끄러지는 햇빛들

어떤 애절한 심정이 저렇듯 반짝이며 미끄러지기만 할까?

영원히 만나지 않을 듯

물과 빛은 서로를 섞지 않는데,

푸른 물위에 수련은 섬광처럼 희다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수련)     


공기와 물의 대화

저 빛이 튀어오르는 듯한     


(수련을 위한 몇몇 말들의 설치, 수련)     


물 속 비밀을 물 밖 세계에 알리는 메신저     


(수련1, 수련)     


바다와 하늘이 아득히 맞닿는 그곳에

가만히 떠있는 배처럼 수련은 떠있다   

  

(두 개의 눈, 수련)     


그것은 시인이 일상에 안주하기를 포기한 대가로, 그 지독한 고통의 결정체로 태어난 한 송이 '떨며 반짝이는 빛', '모든 세계를 닦는 흰 수건' 이다. 일상에서도 매 순간은 창조되어지는 것이므로 수련을 삶에 임하는 태도 등으로 확장시켜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삶에 존엄을 부여하는 것은 정직함과 치열성, 즉, 깊이라고 볼 수 있다.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가며 자신을 성숙한 존재로 단련시켜 나가는 것, 타성과 매너리즘에 젖지 않는 것, 그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의 경계에 수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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