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없으면 안해요 : 영어 공부

by 고은아


어릴 적 영어 공부하라고 할 땐 그렇게 하기 싫었어. 주어니 목적어니, 그게 다 뭐야. 한 귀로 들어왔다가 반대쪽 귀로 바로 나가버리는데. 허허.


난 영어에 소질이 없나 보다, 반 포기 상태로 살았지. 그러다 분노 가득했던 고딩 시절에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을 우연히 들었는데 너무 좋은 거 있지. 귀가 터질 듯 맨날 들었어. 그게 시작이었던 거 같아.


팝송이 좋아지니까 뜻도 모르면서 가사를 무작정 외웠어. 발음은 통통 튀고, 가사 속 사람들은 왜 그렇게 자유로워 보이던지.


영어가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하더라? 그러다가 고딩 때 무슨 영어 상장을 하나 받은 거야. 난 그 상장 하나에 자신감이 붙어서 어? 나 재능있나? 이제 진짜 영어 공부 좀 해봐야겠다고 결심하지.


근데 알지? 그 당시 수능 영어 지문 최악인 거. (지금은 어떤지 잘 모름)


'뭐라는 거야. 왜 이렇게 하나의 문장을 빙빙 돌리고 질질 끌어. 무슨 말이야 이게 대체...'


성냥불처럼 작지만 강하게 불이 올랐었는데, 한쿡 영어 공부가 그 위에 찬물 붓더라. 난 그냥 팍 식어버리지.


그래서 영어랑 다시 멀어졌지. 멀어진 상태로 대학을 갔어. 근데 이제 취업 준비 해야 되잖아. 라떼는 토익이 중요했거든. (지금도 중요해?) 토익 공부하려고 빨간 버스타고 강남역까지 가서 유명한 학원 등록했는데, 무스 잔뜩 바른 젊고 느끼한 선생님밖에 기억 안 나.


그렇게 영어랑 계속 사이 안 좋은 채로 또 몇 해를 날렸지.


그 시기 뭐 해 먹고 살아야 하나. 고민도 하고, 연애도 하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방학이 됐어. 그 해 방학은 다 재미가 없더라? 뭐하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밖에도 안 나가고 그냥 미드, 영화 주야장천 봤어.


근데 와 너무 재밌는 거야. 이 다양성, 이 자유로움! (그때는 이 감정들을 내가 가질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지)


그러다가 개학을 해서 다시 학교를 갔고, 다른 친구들처럼 동아리도 열심히 하고, 소개팅도 하고, 술도 잔뜩 먹다 보니 또 몇 달이 흐르네? 뭘 하고 살아야 할지 여전히 몰랐지. 그러다 졸업을 1년 앞두고 엄마가 어학연수를 가라고 제안해.


그 말에 난 덜덜 떨며 홀로 외국에 가. (가끔은 말 잘 듣는 착한 딸) 근데 나 그때부터 뭔가 느끼기 시작해.


"뭐야. 영어는 공부가 아니라 소통하는 도구였잖아?"


그때부터 영어가 진짜 재밌어지기 시작하더라. 새로운 사람, 새로운 문화. 미드에서 보던 그 자유로움을 내가 느끼고 있더라고.


그래서 말이지, 외국에 계속 살고 싶었어! 근데 어쩔 수 없이 다시 한국에 돌아왔고 취업을 했어.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너무 답답한 거 있지? 불안 증세가 생겼어.


어떡해. 날 살려야 하잖아. 난 다시 즐거움을 따라가. 그러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났어. 이 사람은 필연인지 우연인지 미국인이었고.


그게 2014년이었으니까 벌써 12년이 흘렀네.


그리고 2026년 지금 난 미국에 있어. 이제 어학연수생이 아니라, 이민자야.




친구들아. 뭐 하나 알려줄까.


영어 아무리 조금 할 줄 안다고 해도, 어학연수랑 이민자의 삶은 아예 다른 차원이다? (흑흑)


마치 조기축구하다가 월드컵 뛰러 온 기분? 몇 년간 남편 발음에만 익숙해진 탓인지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솔직히 안 들릴 때도 많아. (겉으로 하하 웃는데, 속으로는 온갖 시뮬레이션 다 돌려봄)


근데 어떡해... 공부해야지. 여기까지 왔는데, 작게 살 수 없잖아.


그래서 앱도 깔았어.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재미없어서 안 들어가게 되네?


나에게 다시 실망하려고 할 때쯤, 깨달았어. 그리고 나에게 다시 물었지.


/



"너 언제 영어가 재밌었어?"


"언어가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하는 도구가 되었을 때"


"헉. 맞다... 그럼 지금 널 설레게 하는 건 뭐야?"


"예쁜 색깔, 사랑스러운 사람들, 자유로운 표현들, 인간과 세상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작업들... 등등"


이제야 답이 나오네. 그럼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공부를 시작해 보자.





그래서 나 요즘 <섹스 앤 더 시티>봐. 예전에 사람들이 추천해줬을 때는 하나도 안끌리더니 이제 때가 됐나봐. 여기 주인공들도 30대이고, 나도 이제 30대야. 주인공들 패션, 그녀들의 상큼하고 진실된 감성, 사람사는 냄새, 뉴욕의 배경에 설레고 공감도 많이돼! (원래는 주로 마음공부용 영상들만 봤었어.)


영어 공부하려고 <에밀리 인 파리> 도 몇 번 봤는데, 손이 계속 안가더라고. 이건 좀 더 판타지 같달까? 현실인 척 하는데 매우 판타지적인. (그럴꺼면 사랑하는 디즈니 영화를 보겠어요!) 근데 <섹스 앤 더 시티>는 그녀들의 고민과 우정이 진짜 사람 냄새 나서 좋아. 철학적이고. (재밌는 건 두 작품 제작자가 같음)


내가 원했던 건 단순히 예쁜 화면이 아니라, 진짜 삶이 담긴 자유로운 표현들이었다는 걸 알게 되더라고. 진짜 삶이 담겨있다면, 아무리 시대가 흐르며 변하는 것들이 있다고 해도 timeless한 부분들이 분명 있는 거 같아.


아무튼 그래서, 요즘 <섹스 앤 더 시티> 영어자막 켜고 보며 공부하고 있어. 물론 모르는 문장도 나와. 그래도 괜찮아. 재밌거든! 재밌으면 공부는 계속 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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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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