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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유럽, 20대의 유럽과 다를 수 있을까?

내 20대의 유럽은 OO 였다

by 김느리

나의 첫 유럽은 Voluntourism이었다. 국제워크캠프 IWO (현, 더 나은 세상)을 통해 참여했던 독일 워크캠프. 참고로 Voluntourism이란 봉사 Volunteer과 여행 Tour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단어로, 좋은 일을 하며 여행까지 즐길 수 있는 취지의 활동을 이야기한다.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봉사도 하며 유럽을 탐험하리라 했던 나의 첫 유럽의 시작은 불효이자 도피였다.


1. 내 20대의 유럽은 '도피'였다


내 나이 25이었나, 당시 두세 달 정도 만났던 남친과 아름다운 이별을 하지 못했고, 그는 우리 아빠에게까지 전화하여 당신 딸과 헤어질 수 없으니 정신적 피해보상금 200만 원을 내놓으라는 협박을 했다.


나를 혼내고 야단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빠는 당장에 그에게 돈을 보냈고, 자기가 성공해서 다시 나에게 올 거라고 말하는 그에게 "난 자네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더라도 절대 안 되네!" 하며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힘주어 말하던, 그 떨리는 목소리가 기억이 난다.


그날 밤, 죄송함에 방에 들어가 한참을 울다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본 우리 부모님은, 작은 식탁에 런닝 차림으로 대충 앉아 안주도 없이 소주를 나눠 마시고 계셨다. 서로 술잔을 부딪치며 말이다.


공교롭게도 이틀 뒤 나는 출국이었고, 공항에서 엄마 아빠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꾹 참았던 기억이 난다. 눈물을 보이는 엄마에게 당신 주책이라고 핀잔을 주는 아빠의 눈도, 촉촉했었다.


오랜 비행 후 독일에 도착했고, 7월의 독일은 참 맑았지만 더웠고, 프랑크푸르트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심심한 도시처럼 느껴졌다.


"엄마, 나 잘 도착했어."


"아 글쎄 그 남자애 엄마한테서 전화 왔었어."


"뭐? 걔네 엄마? 왜왜왜? 뭐래?"


"모든 상황 알게 되었다고 200만 원 돌려줬어~"


"아 그래? 잘 됐네!"


"아빠가 절대로 돈 돌려받지 않을 거라고, 내 딸한테 다시는 연락하지 말게 하라고 당부했는데, 그 엄마가 버리시던 어디에 기부를 하시던 하라고 그냥 돌려준 거야, 글쎄."


"대박!"


"맘 편히 여행하고 와. 잘 때 이 갈지 말고."



나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었다. 당시에는 어렸기 때문에 돈이 중요했던 것 같다. 부모님께 드린 상처는 까맣게 잊고 돈 돌려받았으니 됐네, 생각했던 철없던 나다.


그리고 독일 북부의 작은 마을인 Sage 지역에서 열린 워크캠프가 시작되었다.


2. 내 20대의 유럽은 '내려놓기'였다

지역신문에 소개된 우리들


23명의 캠퍼, 그리고 1명의 리더. 대한민국, 프랑스, 스페인, 일본, 세르비아, 러시아, 터키 등에서 온 젊은이들이 모였고, 머리가 길어 라푼젤이라 놀림받던 프랑스인 남자 리더를 제외하고는, 내가 최고참이었다. 우리는 지역 아동들을 위한 시설 짓기 마무리 작업에 투입되었고,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매일 당번을 정해 돌아가며 저녁을 만들어 먹으며 문화교류를 했고, 주말에는 근처로 필드트립을 떠났다. 나는 러시아 친구들이랑 친했는데, 그중 카트리나라는 16살짜리 소녀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해서 아웃사이더였는데 나를 참 잘 따랐다. (대체 왜?)


캠프 끝나고 말도 안 통하던 우리는 독일을 함께 여행했고, 나는 거의 그 아이의 베이비시터로 걔를 돌봐주었다. 당시 공항으로 가는 돈이 부족하다고 해서 내가 한 5만 원 정도 빌려줬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 아이는 기억하고 있을까?

오른쪽 맨 앞이 나, 내 옆 일본인 친구 옆 무표정한 소녀가 카트리나.


캠프의 막바지에 우리는 파티를 했는데, 세르비아 애들, 프랑스 여자애들, 스페인 남자애들 서로 춤추고 난리가 났었다. 끼리끼리 모여 앉아 눈에서는 하트가 뿅. 선택받지 못한 노땅이던 나는, 그 자리가 재미없고 불편했었다. 누구 하나라도 나한테 와서 말 좀 걸어주지 싶었는데, 리더 라푼젤은 러시아 올가라는 여자한테 빠져 허우적대고, 내가 귀여워하던 세르비아의 6살 연하 필립한테, 같이 놀자 하며 팔짱을 끼다 그 아이가 손을 확 빼버려서 민망하기도 했고.


참, 나 이제 나이가 들었구나, 더 이상 20대 초반의 풋풋함도, 누구에게나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원래 내려놓기란 힘들지만, 이때부터 차차 내려놓음을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이를 낳고 아줌마가 돼서는 정말 거의 다 내려놓게 되었지만.


3. 내 20대 유럽은 '시행착오'였다


캠프 후 3주의 자유시간이 생겼다. 나는 유럽 몇 개국을 혼자 돌아다니기로 했고 내 첫 유럽여행의 테마는 "나 자신을 찾자"였다.


뭔가 거창한 인생의 진리, 나 자신, 꿈과 같은 엄청난 것들을 알고 이루고 싶었다. 그 짧은 여행을 통해.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우습지만, 당시에는 진지했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까.


나는 아주 감상적이 되어 내가 보는 많은 것들에, 느끼는 작은 감정에도 과하게 몰입했던 것 같다.


조용한 스위스의 작은 마을에서 산책하던 개를 허락 없이 만져보다 손을 물리기도 했다.

'나는 강아지를 참 사랑하는데,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를 당시에는 참 심각하게 고민했고 몰두했다. 그냥 남의 개는 함부로 만지면 안 되는 것인데 말이다.


알프스, 융프라우에 오르는 기차에서 졸다가 시끄럽게 이를 간 것도, 몸살이 걸려 끙끙 앓았던 런던에 한 호스텔 6인실에서 (혹시나 모를 로맨스를 위해 남녀 공용 방을 택했지만 역시나...) 아파하며 자다가 천둥처럼 이를 간 것도 참, 피식 웃음이 나오게 하는 추억이다.


로마, 바티칸 성당에서 미켈란젤로의 라 피에타를 보고 종교에 관심이 생겨, 귀국 후 세례를 받기도 했다. 도대체 신이 어떤 존재이길래, 인간이 이렇게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창조해낼 수 있었을까 하는 호기심에 성당 문을 두드렸고, 한 동안 열심히 다니다가 요즘은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냉담 중이다.


크로아티아에도 많은 성당이 있으니, 고해성사하고 다시 마음을 열어봐야겠다는 계획만 가지고 있다.


스위스에서는 비싼 돈을 주고 패러글라이딩을 했고, '아차! 나 고소공포증 있었지'를 하늘에 올라간 지 10초 만에 깨달았고 결국 2분 만에 내려왔다. 고소공포증을 극복해보고자 귀국 후 락 클라이밍을 해서 높은 벽에도 오르고 암벽도 타곤 했지만, 그때마다 두 다리가 덜덜 떨리고 헛소리가 나와서, 웃음거리가 된 적도 많다.


"자일에서 소리가 나요."


팽팽하게 당겨지는 자일 (로프) 소리가 들릴 때마다 줄이 끊어질까 봐, 울먹거리던 나는 진심으로 죽고 싶지 않아서 떨었다. 지금은 남편도 아이도 있는 처지라, 다시는 락 클라이밍은 못 할 것 같다.


클라이밍 도전, but 고소공포증은 극복이 안 되더라


런던에서 오페라의 유령을 보기 위해 티켓을 사는데, 당시 우리 돈으로 2-3만 원 정도면 좌석의 퀄리티가 꽤 바뀌었지만, 나는 싼 티켓을 샀었다. 몸살이었고,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높은 구석자리에 앉아 오페라를 보며 졸다 또 이를 갈았고, 근처에 앉아있던 무례한 영국 애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저녁에 어떤 펍에 가서 혼자 맥주 한 잔 마시는데, 사람들이 글쎄 춤을 추는 것이다. 나도 혼자 업이 돼서 춤을 췄는데, 내 옆에 백인 무리들 중 한 남자가 우스꽝스럽게 내 춤을 따라 하고 있었다. 그 무리 속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20대의 유럽은 서툴렀고, 돈만 많이 걱정했으며, 무언가를 많이 채워오고 싶었지만, 내 비어 있는 그릇만 확인했던 여행이었다.


나는 품위 있지도, 아름답지도, 똑똑하지도 못했고, 여유도 없었다. 유레일패스를 수기로 쓰며 기차 타던 시기라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9월 1일 날짜에 작대기 그어 9월 4일에도 타고, 막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내 30대의 유럽은 어떤 모습일까?


출국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유럽의 목표는 '무사히 다녀오자'이다. 잘 생존하자! 개고생 할게 뻔 하지만, 그래도 덜 아프고, 재수 없는 일 없이, 험한 꼴 안 당하고, 무사히 돌아오자.


첫 유럽 여행을 다녀온 지 10년이 지났고, 나는 이제 30대 중반 애 엄마가 되었다. 선생으로 여기저기서 일해봤고, 나름 많은 경험을 하고 비싼 인생 레슨도 받으며 살아와 강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30대의 나도 여전히 서툴고, 돈만 많이 걱정하고 있으며, 이젠 내가 아니라 내 아이가 많은 것을 채워 오기를 바라고 있다.


나의 30대 유럽은 진짜로 어떤 모습일까?

어린 내 아들에게,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암과 싸워 이겨낸 우리 엄마에게 유럽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


가을 겨울에 크로아티아는 조금 쓸쓸하다고 하는데, 우리의 여정이 핑크빛까지는 아니어도, 멋진 자다르의 석양과 같은 감동적인 색으로 수놓아지는 것을 상상해본다.


우리들 인생이라는 한 편의 긴 영화에서, 긴장감이나 불편함 없이 무난하게 흘러가는 어느 씬처럼, 우리에게 쉼과 평화가 함께 하길 조용히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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