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르카 국립공원에서 한국인 부녀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안타까운 기사. 크르카 강의 폭포에 빠진 20대 딸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도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안타깝게도 부녀는 물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Rest in peace. 이 아름다운 곳에서의 비극이라 더욱 안타까운.
"저희 왔어요!"
저녁을 얻어먹으러 부모님 댁에 방문한 늦은 오후, 할머니 댁 냉장고를 뒤져 이것저것 축내는 4살 손자가 귀엽다고 웃음꽃이 피던 집에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뉴스를 통해 전해지던 사고 소식 때문이었다. 비극을 겪은 그 가족의 슬픔이 피부로 다가왔다. 작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우리였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웠던 엄마의 암 3기 선고. 위험했던 흉부외과 수술, 4번의 항암과 33번의 방사선 치료를 겪으며 온 가족은 지옥 불구덩이 속에 있었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엄마는 1년째 재발 없이 건강을 회복 중이고, 딸과 손자와 함께 크로아티아 4달 살기에 동참하기로 했다.
사랑하는 내 사람들과 좋은 곳에 가서 멋진 추억 만들 거야! 나는 모두 함께 행복하게 잘 다녀 올 자신이 있고, 한층 더 성장한 아이와 부쩍 건강해질 엄마를 상상한다!
매일 밤, 가슴 떨리는 우리의 여정을 떠올리며 잠 못 이루던 나는, 내 꿈의 목적지인 크로아티아에서 일어난 다른 한국인 가족의 비극에 절망하고 있었다.
혹시 사고가 나면 어떡하지? 엄마가 갑자기 아프면 어쩌지? 아니, 아예 못 떠나게 되면 진짜 어떡하지?
불안함과 두려움은 점점 커져 나를 삼키고 있었다.
엄마의 작은 기침, 숨 헐떡임 하나에도 일희일비하던 긴 시간이 지나, 출국이 40여 일 앞으로 다가왔고, 우리의 긴 여정의 마지막 관문인 엄마의 폐 추적검사는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내 이번 결과가 괜찮아야 할 텐데."
엄마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려운 것은 나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우리에게 놀러 올 신랑과 아빠의 항공편을 살 때, 아빠가 표 환불이 가능한지 조심스레 물으셨다. 수수료 몇만 원 내면 환불된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나는 아빠 질문의 의도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서로 터놓고 말만 안 했지, 우리 모두는 두려웠던 것이다. CT를 찍기까지 일주일, 결과가 나오기까지 또 일주일, 앞으로 우리 가족은 가슴을 졸일 것이다. 당연히 괜찮을 거란 믿음이 있지만, 그래도 가슴 한편에는 묵직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작년, 우리 엄마의 암투병에 대해 SNS에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우연히 그 글을 보게 된 엄마는 서운한 마음을 비치셨었다.
나에게는 엄마의 투병이 감성적이고 눈물 나는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타인의 관심과 위로를 받을 수 있게 하는 소재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암 선고와 끔찍한 투병은 숨기고만 싶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미처 몰랐었다. 왜 이러한 불운을 남도 아닌 내가 겪게 되는 건가, 남의 동정도, 되지도 않는 위로도 받기 싫을 것 같은데, 나는 그것을 내 하찮은 글의 소재로 쓰고 있었다.
지금 이 글도 우리 엄마는 우연으로라도 못 보길 바란다. 당신 앞에선 언제나 씩씩하고 용감무쌍한 딸이 이렇게 겁쟁이라는 것을 알면, 엄마가 무너질 것 같기 때문이다.
두근두근, 내 심장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우리 엄마, 아무 이상 없어야 할 텐데.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다.
2주 후, 크로아티아 기다려라! 우리가 진짜로 간다! 하는 글을 쓸 수 있게 되길 기도하며, 나에게 가장 가까운 내 가족들에겐 절대 털어놓을 수 없는 두려운 감정을 이 흰 바탕에 토해내고 있다. 누군가의 위로나 관심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라도 안 하면 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이다.
제발 우리 엄마, 아무 이상 없길. 그래서 계획대로 크로아티아로 떠날 수 있길. 이 모든 계획이 무산되어 좌절할 일이 없길, 오늘 밤도 간절히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