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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리틀 포레스트를 꿈꾼다

세 가지 교훈

by 김느리

<1>

신랑이 몇 달 전부터 쉬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꺼냈다.


"휴가 때 어디 해외라도 다녀오자. 너무 힘들다."


"올해 너 출장으로 유럽 여러 번 다녀왔고, 나도 다음 달에 크로아티아 가는데, 괜히 돈 낭비 아닐까?"


"그냥 국내에서 쉬자."


"해외는 돈만 많이 들지. 국내 좋은 리조트 내가 알아볼게."


그때는 신랑이 가만히 내쉬는 한숨이 가볍게 느껴졌었다.



<2>

얼마 전,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봤고 추천한다며 김태리가 연기를 잘하고 마스크가 매력적이라는 그를 보며, 그 영화에 대한 띠꺼움이 생겼다.


'김태리 평범하던데...'


질투라기보다는 다른 여자에 대한 남편의 관심에 대한 괜한 '띠꺼움'이었다.


*우리 부부는 종종 띠껍다는 말을 하곤 한다. 국어사전에는 안 나오는 속어인데 이거 좀 아니꼽고 별로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띠껍냐? 쟤 띠껍더라.’ 가끔씩 우리들은 교양 없는 말을 내뱉으며 분위기를 가볍고 유쾌하게 만든다.


<3>

요 며칠, 아이에게 짜증을 내는 나를 발견했다.


우리 엄마의 결과에 따라 '크로아티아 가자!!' 혹은 '크로아티아, 잘 가'가 되는 중요한 시기, 나는 불안하고 예민하다는 이유로 괜히 이 작은 꼬마를 구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주는, 시간이 참 안 갔다.


엄마는 화요일에 CT를 찍었고, 나는 하루하루 극심한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다음 주 화요일 진료 때,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엄마와 함께 결과를 들어야겠지.


아이와 신랑이 잠든 밤 10시, 어떻게든 잠들기 전까지 시간을 좀 때워야겠다는 생각에, 넷플릭스에서 힐링 영화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찾은, 리틀 포레스트.


'한 번 봐볼까?'


내 표정은 굳어 있었고, 별 기대 없이 와인 한 잔 들고 소파에 앉았다.



영화를 보고 느낀 세 가지


그제야 보였다.


회사생활에 몸과 정신뿐 아니라 영혼까지 탈탈 털려 번아웃 직전의 우리 신랑이 그토록 떠나고 싶던 이유가.


일주일 내내 야근으로 밤 11시 12시가 다 되어 지친 몰골로 퇴근하는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 말을 되뇌었었다.


"아, 정말 너무 힘들다."


내가 곧 크로아티아 떠난다고, 이번엔 말아, 올여름은 그냥 참아, 올해는 됐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기적인 나는. 그는 영화에서처럼 1년까지는 절대 못되더라도, 단 며칠의 힐링이 절실했을 텐데 말이다.


1. 이미 지칠대로 지쳐 녹초가 된 사람에게 '쫌만 참아'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에게 변변하게 요리해준 것이 없다는 것도 떠올랐다. 신혼, 어느 비 오던 저녁, 오징어 부추 부침개를 다섯 장 연속 실패하고는, 씩씩대다가 결국 맛 더럽게 없는 몇 장을 부쳤고, 다시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신랑이 맛있다고 했던 닭볶음탕은, 사실 마트에서 파는 소스가 다 한 것이었다.


'야무진 손으로, 정성껏 요리하여, 예쁜 그릇에 내어 먹고 싶다. 먹이고 싶고.'


2. 맛있는 요리는 삶의 활력이자, 즐거움이자, 힘을 내어 오늘을 살게 하는 힘이다. 나는 잊고 살았다. 요리하는 즐거움, 요리를 해서 먹이는 즐거움.




영화 속, 엄마와 딸의 장면들을 볼 때마다 부러움이 밀려왔다. 나도 친구 같은 딸이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아직 4살인 아들은, 훗 날 엄마보다 더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떠날 것이고 우리는 친구라기보다는 그냥 엄마와 아들일 것이다. 영원히.


결국 남의 남자가 될 이 쪼꼬만 놈의 자는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그래, 영화 속 엄마가 그랬듯, 얘 스무 살까지는 건강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많은 사랑과 경험을 주고, 그 후엔 미련 없이 나도 얘도 서로 갈 길 가자고.


3. 내 품을 벗어나기 전까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랑이 가득했고, 함께 반짝이는 추억을 만든 엄마로 기억되자.



영화라는 것이 참 삶에 대한 교훈을 주기도 하고, 내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주기도 하는 것 같다. 사계절이 지나가는 것이 참 아쉽던 영화, 삶에 있어 쉼, 맛있는 요리, 그리고 문득 생각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보석같이 소중하다는 것. (물론 친구도.)


크로아티아에 가게 되면 온전히 쉬며 공부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엄마와 아들과 좋은 추억을 남기고 싶다. 거창할 게 없는 목표, 하지만 내 삶에 필요한 딱 그것들.


엄마, 우리 크로아티아 가자!

검사 결과는 당연히 아무 이상 없을 테니, 우리 가서 잘 쉬고 오자. 그렇게 될 거라고 믿자 우리.


다음 주 화요일, 결과가 좋더라도 나는.. 꼭 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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