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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리 Oct 23. 2024

계모임 다섯 개는 해야 강릉사람이죠

21세기에 계모임이라니

’계모임을 하지 않으면 강릉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계는 강릉의 주요문화 중 하나다.


어렸을 때 계를 했던 적이 있다. 고등학교 때였다. 한 달에 몇천 원씩 모아서 순서대로 원하는 물건을 샀었다. 어린 나이엔 나름 적지 않은 돈이 모였기 때문에 다들 즐거운 마음으로 계를 했던 것 같다(절대로 삥을 뜯은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계’란 굉장한 신뢰가 없으면 성립할 수 없었다. 계가 무엇인가? 매달 친구들과, 또는 지인들과 소액의 돈을 모아 매달 순번인 사람에게 몰아주는, 목돈이 필요한 시기에 유용하고 또 유행했던 구시대의 문화 아닌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린 시절 보고 들었던 드라마나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에는 언제나 ‘누가 곗돈을 들고 날랐다더라’는 얘기가 올랐다. 흔해서 새롭지도 않았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돈을 맡긴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었다. 돈 앞에서는 가족도 저버리는 사람들까지 있는데, 하물며 남이면 오죽하랴. 은행도 망할 수 있는 세상에, 돈 앞에 믿을 건 자기 자신 뿐이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은행을 쓰지 않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돈, 아니 ’돈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약간의 불신을 기저에 깔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험도 믿지 않는다. 그저 보험사란 가입할 때는 세상에 믿을 건 오로지 보험뿐인양 유혹적인 감언이설로 사람을 구슬리지만, 막상 보험금을 탈 때가 되면 제대로 설명해주지도 않았던 약관의 작은 글씨를 들먹이며 보장범위라 아니라 한다. 화장실 들어올 때랑 나갈 때 마음이 다르다더니, 남의 돈 제 주머니에 넣을 땐 ‘우리 고객님’이고 보험금 지급할 때는 눈에 불을 켜고 어떻게든 안 줄 방도를 찾는다. 물론 최소한의 보험은 가입하고 있지만, 아무튼 ‘돈 굴리는 회사가 남 좋은 일을 할 리가 절대 없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다.

쌍둥이를 낳을 때에도 어린이 보험을 알아봤었는데, 어디든 시큰둥한 반응이라 ’가입할 때조차 시큰둥하면 보험금 줄 때는 대체 어떤 대접을 받을까‘ 싶어 그냥 매달 보험금 대신 애들 계좌에 돈을 넣기로 했다. 도중에 아프거나 해서 목돈이 필요하면 거기서 꺼내 쓰고, 많이 쓸 일이 없으면 나중에 성인이 되어 줄 수 있고, 매달 사라지는 돈보단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한 아이가 염증으로 일주일 정도 1인실에 입원한 걸 빼고는 크게 아픈 적이 없었고, 덕분에 아이들 통장에는 내 계좌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어 있다.


얘기가 조금 다른 데로 흘렀지만, 다시 계모임 얘기로 돌아와서.


그래서 강릉에 왔을 때 놀랐다. 자연스럽게 잊고 살았던 ‘계 문화’가 강릉에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심지어 강릉 사람이라면 계모임 대여섯 개 정도는 기본이라고 했다.


사실 계모임은 강릉의 유구한 전통이다. 강릉에는 정자가 많은데 이곳에 모여 계모임을 하거나 손님을 접대했다고 한다. 경포호 주변에만 해도 12개의 정자가 있다(안타깝게도 2023년의 산불로 상영정은 전소되었다). 그 중 금란정은 금란정은 금란반월회 계원들이 세운 정자로, 계모임이 5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계모임들 사이에는 경쟁의식도 있어, 어느 계모임의 정자가 더 높은 곳에 있는지를 두고 기싸움을 하기도 했다.  


경포호 주변 정자 중 하나였던 석란정은 1956년 세워져 비교적 그 역사가 짧은데, 1914년 갑인년 태어난 동갑내기 문인들이 계모임을 하기 위해 만들었다. 근현대에 들어서도 계모임을 위한 정자를 짓는 걸 보면 역시나 계모임은 역사와 전통이 있는 강릉의 문화다. 다만 석란정은 2017년 원인 모를 화재로 불에 타 없어졌는데, 이 때 진화 작업을 했던 소방관이 순직한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


강릉 사람들의 문화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나도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작은 계를 하고 있다. 돈을 모아 여행을 가자는 이른바 ‘여행계’인데, 다들 애가 둘씩 있는 아줌마들이라 그런지 여행 갈 날짜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년 즈음에는 갈 수 있기를 바라는데, 과연 어떨지?

금란정에서 바라본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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