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커피를 좋아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변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시기 시작한 이후(<저는 커피펄슨입니다만(https://brunch.co.kr/@lilylee26/48)>참조)대학교 때 한창 붐이 일었던 스타벅스와 커피빈 같은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캐러멜 마키아토와 바닐라라테를 배웠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아침의 피곤함과 점심식사 이후의 노곤함을 달래줄 아메리카노가 벗이 되어줬다.
특히 첫 회사가 미식을 주로 다루는 잡지사였던 까닭에, ‘맛있는 커피’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다. 회사나 집에서 주로 마시는 커피는 대용량의 코스트코 커클랜드 원두였지만, 이따금 맛보는 싱글 오리진 원두나 핸드드립 커피는 또 새로운 맛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강릉에 온 것도 운명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강릉은 명실상부 커피의 도시가 아닌가.
커피 원두 재배지도 아닌 강릉이 커피로 유명해진 이유는 재미있게도 자판기 믹스 커피 덕분이다. 안목해변 인근은 예로부터 낚시객을 비롯한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었다. 바로 옆에 강릉항이 있기도 하고, 남대천이 흘러 바다와 만나는 하구도 가까운 지리적 특성이 한 몫 했을 것이다(이런 곳엔 낚시객들이 많다). 이곳에 커피 자판기가 하나 있었는데 그 맛이 기가 막혔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게 되었다.
안목해변이 커피거리로 거듭나게 된 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다. ‘안목해변 커피가 맛있다’는 소문에 힘입어 ‘제대로 된 원두 커피를 한 번 팔아보자’는 카페가 생겼는데, 그게 바로 <커피커퍼>다. 커피 박물관과 함께 다양한 커피 관련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커피에 진심인 곳이다.
<커피커퍼> 이후로 카페들이 하나둘씩 생겨나 지금의 강릉 커피거리가 만들어졌다. 해안선을 따라 상점이 길게 늘어선 모습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 가게 대부분이 카페라는 사실은 특색이 있다. 강릉에 살면서 가장 자주 찾는 관광지라면 단연코 이곳을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커피를 좋아한다면 현지인도 많이 간다. 단, 토요일이나 일요일 오후는 피해서 간다. 들어가는 길부터 차가 꽉꽉 막혀 강릉에서는 보기 드문 교통체증을 뽐내기 때문이다.
안목의 터줏대감을 꼽자면 커피커퍼 말고도 <엘빈>을 꼽을 수 있다. 강릉에 아직 수준높은 서양과자점이 없던 시절, 생과일 타르트나 트렌디한 조각 케이크 같은 걸 먹으려면 엘빈에 가야 했다. 21세기 초 유행했던 파스타집 <쏘렌토>나 <캔모아> 풍의 프로방스 빈티지 느낌 물씬한 인테리어가 옛스러웠던 그곳은 지금은 폐업하고 다른 세련된 베이커리카페가 생겼다. 요즘은 대중의 미식 수준이 높아져 강릉에서도 제법 맛있는 빵과 케이크와 구움과자를 많이 만나볼 수 있다(어쩐지 잘난 척 얘기했지만 나도 그 맛을 즐기는 대중 중 한 사람에 불과하다).
안목해변의 커피 자판기만 있었다면 강릉이 이렇게 커피의 도시로 거듭나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대한민국 1세대 바리스타라는 박이추 선생님이 강릉에 터를 잡으셨기 때문에 더 멋진 스토리텔링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박이추 선생님의 보헤미안 커피는 연곡에 본점을 두고 있는데, 아기자기한 건물에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참 예쁜 곳이었다. 접근성이 좋은 곳은 사천점인데, 늘 사람이 많다. 게이샤 커피가 다른 핸드드립 카페에 비해 저렴한 편이고, 두터운 토스트와 찐 달걀, 그린 샐러드로 구성된 일본 킷사텐 풍의 모닝 세트가 있으니 아침 일찍 들러 커피와 식사를 즐기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곳은 오죽헌 근처에 위치한 <데자뷰로스터리>다. 직접 원두를 로스팅하는 곳은 강릉에도 많지만, 이곳의 에티오피아는 정말 맛있다. 에티오피아 특유의 산미와 상큼함이 잘 드러나면서도 바디감이 있어 오죽헌에서 공연하는 날이면 많이 들렀다.
원두나 드립백도 자주 산다. 쌍둥이를 낳고는 커피를 내려 마실 시간도 없어 캡슐 커피만 주구장창 마셨는데, 이제 아이들이 만 3세가 되어 자기들끼리 좀 놀기도 하고, 어린이집에도 다니고 하니 조금 여유가 생겼다. 예전부터 쓰던 드롱기 에스프레소 머신은 고장나서 진즉 처분했지만 최근엔 이케아에서 저렴한 프렌치프레스를 구매해서 사용 중인데, 확실히 캡슐 커피보다 훨씬 맛이 좋아 애용 중이다. 좋아하는 데자뷰 로스터리 뿐만 아니라 남항진 가는 길에 있는 로스터리 공장 <오미토리커피>, 강릉역 가까이 위치해 여행객들에게 안성맞춤인 <로스터리써클>, <주가커피> 등 직접 로스팅을 하는 개인 카페가 많이 있어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
당이 필요할 때면 찾기 좋은 크림라떼 맛집들도 있다. 흑임자라떼로 유명한 <툇마루>, 달콤한 초당옥수수라떼가 있는 <밥스갤러리>, 후추를 뿌린 시그니처 커피가 독특한 <이진리> 등이 그 주인공. 툇마루는 강릉의 특이한 크림라떼 유행을 이끈 곳인데, 지금도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어 항상 줄을 서야 맛볼 수 있다. 줄서는 게 싫어서(강릉 사람들의 특징이다) 사천진리 해변에 위치한 <바우카페>를 주로 가는데, 툇마루 오너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곳으로 같은 레시피로 흑임자라떼를 뽑아낸다. 개인적으로는 툇마루보다 오히려 바우카페의 흑임자라떼가 더 맛있었다. 줄도 안 서고, 예쁜 사천진 바다도 구경하고, 일석이조다.
하지만 역시 가장 많이 가는 카페는 스타벅스와 메가커피다. 스타벅스에선 한두시간씩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글을 쓰거나 멍 때리기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메가커피는 자주 가는 마트 맞은 편에 있어 장을 보고 ‘아아 한 잔 때리기’ 제격이다. 근데 둘 다 커피가 그렇게 맛있지는 않다. 이런 곳에선 습관처럼 커피를 마신다. 아아 한 잔이요. ‘아아’는 한국인의 보리차가 아니던가?
강릉엔 또 커피 파생상품으로 ‘커피콩빵’이라는 것이 있다. 선물로 사가기 좋은 만쥬 스타일의 빵인데, 재미있는 것은 이 커피콩빵을 개발해 파는 업체가 여러 곳이라 맛이 다 다르다는 점이다. 팥 앙금 맛이 많이 나고 모양만 커피원두 모양인 것도 있고, 은은하게 시나몬향이 나는 것도 있고, 제법 커피 맛이 많이 나는 것도 있다. 개인적으로 앙금이 들어간 빵을 좋아하지 않아 추천하는 곳은 없다.
다음 주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10월 24~27일) 안목해변 강릉커피거리 중심으로 강릉 커피축제가 열린다. 커피축제는 매년 가지만 늘 사람이 붐벼서 매번 시음 몇 개 해보고 원두나 사고 말았었는데, 이번에는 스탬프 랠리도 도전해볼까 한다. 평일에 아이들 어린이집 보내고 해야할 일은 잠깐 미뤄두고, 후다닥.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면 안된다지만, 집에 처박혀 일만 하기엔 이렇게 좋은 가을날이 아깝기 그지 없다. 어쩌면 가을날의 커피 투어도 내 인생에서 몇 번 안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