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가 화폐는 아니지만
강원도에서 왔다고 하면 다들 ’집 앞에 감자밭 있냐‘ 물어본다는데, 우리 집 앞에는 감자밭은 없어도 옥수수밭은 좀 있다. 밥집과 술집이 모여있는 동네 번화가까지 걸어가는 길에도 어김없이 옥수수밭을 마주할 수 있다. 덕분에 나는 서른 넘어서야 처음 실물로 본 (밭에서 자라는)옥수수를 우리 아이들은 애기 때부터 봐서 말문이 트이자마자 ‘이거 옥수수야!’를 외쳤다. 조기교육의 힘이다.
그래도 역시 강원도 하면 감자다. 오죽하면 강원도를 ‘감자국’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감자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춥고 산이 많은 강원도에선 감자를 많이 키워 먹었을 것이다.
그래서 감자를 이용한 요리도 많다. 단오제가 되면 카페에서도 만들어 파는 감자전은 강릉의 대표 메뉴다. 오죽하면 ‘감자적 마을’이 따로 있을 정도다. 강릉에서는 감자전을 ‘감자적’이라고 부르는데, 남항진 근처 병산마을에는 이 감자적과 닭발을 파는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신당동 떡볶이 골목 마냥 줄지어 서 있지 않고, 마을 곳곳에 조금씩 골고루 퍼져 있는 게 인상적이다. 그래서 골목마다 다니며 흩어진 감자적 가게를 하나씩 도장 깨기 하는 재미가 있다. 비슷할 것 같지만 맛이 다 달라서, 나만의 취향을 찾아보는 것도 재밌다.
감자를 곱게 갈아 얇게 부쳐먹는 감자전은 얇게 잘 펴서 노릇노릇하게 굽는 것이 포인트다. 반죽이 너무 뭉치면 떡처럼 뭉쳐서 바삭바삭하고 쫀득한 특유의 식감이 잘 살지 않는다. 이 기술에 따라 감자전 맛집이 결정된다. 개인적으로 병산마을에서 좋아하는 집은 <감자적1번지>인데, 기름을 듬뿍 둘러 구워 자칫 느끼할 수 있는 감자전에 아주 가늘게 썬 청양고추가 살짝 들어가 느끼함을 잡아준 것이 인상적이다. 물론 아이들을 줄 때는 매의 눈으로 고추가 없는 부분을 찢어서 줘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말이다. 직접 쑨 도토리묵으로 만든 도토리묵무침도 맛있고, 제육볶음 같은 맛이 매력적인 닭발도 맛있지만 도토리들깨수제비가 정말 맛있다. 들깨수제비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이곳의 들깨수제비는 고소하면서 텁텁하지 않아 자꾸만 손이 간다.
감자 요리에 옹심이가 빠지면 섭하다. 옹심이는 곱게 간 감자를 새알심처럼 뭉쳐 국에 넣고 끓여 만드는 강원도의 향토 음식으로, 특히 영동 지방에서 많이 먹은 요리다. 옹심이는 그 구수한 이름처럼 맛도 구수하다. 강릉에 놀러 오는 친구나 지인에게 ‘옹심이 먹으러 갈래?’라고 물었을 때 ‘그래, 가자!‘는 답변을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비운의 음식이지만(이름 탓일까?), 옹심이도 꽤 매력적인 음식이다.
좋아하는 옹심이 식당은 <포남사골옹심이>인데, 사골로 국물 맛을 내 익숙한 감칠맛과 옹심이의 거칠고 쫀득한 식감이 어우러져 제법 괜찮다. 다만 나도 이곳에서는 ’순옹심이‘ 메뉴보다는 ’옹심이국수‘를 먹는다. 옹심이 몇 개 먹고 나면 매끈하게 후루룩 넘어가는 칼국수 면발이 더 맛있게 느껴진다. 옹심이를 먹어보고 싶은데 다소 도전하기 두렵다면 칼국수와 옹심이를 함께 넣고 끓인 옹심이국수를 적극 추천한다.
먹는 얘기만 하면 정신을 못 차리는데, 사실 감자는 꽃도 예쁘다. 여름이면 푸른 감자밭에 작고 흰 꽃이 핀다. 여름날 강릉의 시골길을 달리다가 혹여나 밭에 희게 피어난 꽃들을 본다면 감자꽃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맛있는 감자요리를 먹으러 갑시다.
* 타이틀 사진 출처 :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