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와 북유럽여행 2화 : 시작은 연착부터

결국 밥 먹고 잔 것 뿐인데

by 릴리리

결혼 10년차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북유럽 여행기


시어머니와

북유럽 여행


2화

시작은 연착부터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6월이 왔다. 여행을 열흘 가량 앞두고 여행사에서 잔금을 입금해 달라는 연락이 왔고, 햇살이 눈부시던 6월 논현동 길거리에 서서 5백만 원이 넘는 돈을 아이폰으로 입금했다. 어머님은 두 달 전부터 환전을 다 해놓으셨다고 하셨다. 엄마는 집에 있던 100유로를 내 손에 쥐어줬다.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출국 이틀 전에서야 일정을 확인하고 짐을 챙겼다. 그때서야 4개국 화폐가 모두 다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EU는 역시 경제 대통합은 이루지는 못하였나 보다. 한참 무지했던 내 자신을 반성했다.

환전은 하지 않았다. 스웨덴의 가게들은 오히려 현금 결제를 거부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몇 년 전 본 뉴스기사를 떠올리며 신용카드와 엄마가 준 100유로만을 챙겼다.


출국 전 날 미리 서울에 계신 어머님 댁에 올라가서 하룻밤 자기로 했다. 1년 반 전 서울생활을 접고 내려온 강릉은 그럭저럭 살만한 동네지만 인천공항에 가려면 서너시간 가까이 리무진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평창올림픽 덕분에 KTX가 생기긴 했지만 서울에서 공항철도를 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잘 이용하지 않게 된다.


어머님 댁 근처 알라딘 중고매장에서 만화책을 읽고 저녁엔 친구 P양을 만나 떡볶이를 먹었다. 옛날에 어머님과 같은 아파트에서 살던 시절엔 남편과 둘이서 종종 가곤 했던 가게였는데, 오랜만에 갔더니 뭐가 맛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 엉뚱한 메뉴를 시켰다. 그래도 먹을만 했다. 떡볶이란 맛없으면 안되는 음식이다. 마찬가지로, 고기를 튀긴 음식도 그렇다. 탕수육이나 규카츠 이런 거. 신발밑창을 튀겨도 맛있다고 하지 않는가? 뭘 튀겨도 맛있는 튀김인데 고기를 튀겼다니 치트키를 쓴 거나 다름없다.


아무튼 떡볶이는 나쁘지 않았다. 밥까지 볶아 먹었다. 아무래도 한민족은 볶음밥의 민족인 것 같다. 뭐든 마무리로는 밥을 볶아버린다.


P양이 선물로 책을 주었다. 제목은 <혜성이 다가온다>. 토베 얀손의 무민 연작소설이었는데 동화인데도 분위기가 어둡다고 했다. 고맙게 받았다. 책 날개를 보니 <혜성이 다가온다>는 무민 연작소설 시리즈 중 첫 번째였다. 일정이 빡빡해 따로 책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백팩에 챙겨 넣었다.


비행기는 오전 10시 출발이었다. 공항 집합 시간이 7시라 5시 반 쯤 일어나 준비하고 리무진 버스를 탔다. 어둑했는데 가는 동안 날이 밝았다. 정신없는 여행사 카운터에서 수신기와 여행 일정표가 담긴 파우치를 받았다. 수하물 태그도 줬는데 짐 옮길 때 혹시 누락되거나 하면 안되니까 캐리어에 달았다. 수신기로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을 수가 있었다. 패키지 여행은 십여 년 전 가족 여행으로 간 이후로 처음인데,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싶었다. 그 땐 이런 게 없었다.


타고갈 비행기는 핀에어였다. 핀에어라면 과거 잡지사에서 일할 때 한창 홍보를 많이 하고 있었던 탓에 관련 기사를 많이 실었던 기억이 있다. 기내 어메니티가 전부 마리메꼬 제품이라고 했었다. 담당자가 친절해서 기사를 잘 실어줬었다. 한창 기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연착 소식이 들렸다. 우리가 타고갈 비행기가 인천으로 오는 도중 응급환자가 발생해 근처 공항에 긴급착륙하는 바람에 제 시간에 출발할 수 없을 거란 얘기였다. 아직 전달받은 사항이 없어 언제 뜰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 당황스러웠지만 별 수 없는 일이다. 알겠다고 하고 헬싱키까지의 티켓과 헬싱키에서 코펜하겐으로 갈아타는 비행기의 티켓을 받아들고 나왔다. 어머님은 당연하게도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셔서 대한항공은 이런 적이 없다며 역정을 내셨다.


출국 심사를 마치고 푸드코트에서 밥을 먹었다. 퀴즈노스가 있어서 거기서 샌드위치를 주문해 먹었다. 어머님은 기념이라며 판도라 매장에서 참을 하나 사주셨다. 감사합니다.

게이트 앞에 앉아서 엄마와 카톡을 하다 이 사실을 말했더니 그런 경우엔 식사비를 따로 줬다며 나보다 더 불만들을 쏟으셨다. 그러냐고 하고 말았다. 나는 아무래도 너무 느긋한 성격이라, 게이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글이나 쓰고 영상이나 보고 그랬다.


생각보다 금방 이륙 안내가 떴다. 12시 10분 출발. 한시간 오십분 연착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금방이라 기분이 좋아졌다.

사전 체크인 때 가능한한 앞자리를 했는데 옆이나 앞자리 모두 사람이 없어서 편하게 눕기도 하고 다리도 쭉 뻗었다. 오랜만의 장거리 비행이라 힘들지 않을까 싶었는데 자리도 넓었다. 모니터는 터치 스크린이었다. 영국이 마지막 장거리 비행이었으니 거의 10년이 다 되어간다.

기억하는 장거리 비행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미국에 갈 때였다. 도쿄를 출발해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였는데 좁은 이코노미석에 갇혀 먹고 자고 먹고 자고 그야말로 사육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영화를 몇 편 보고도 지루해 개인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에 내장된 게임을 했는데 오델로가 참 재밌었다. 그 기억을 되살려 개인 모니터를 눌러보았는데... 게임이 없었다. 영화나 TV시리즈 등은 굉장히 많았다. 내가 지금까지 탔던 어떤 비행기보다 많았다. 근데 보고 싶은 게 하나도 없었다. 관심이 조금 간다 싶어도 시놉시스만 읽고 좀처럼 플레이 버튼까지 손가락이 가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건 내겐 항상 힘이 드는 일이다. 영화를 보기 전 두 시간 정도의 러닝타임 동안 온전히 집중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하는데 이 마음의 준비가 제법 오래 걸린다. 그래서 1년에 보는 영화는 스무 편이 안 되는 것 같다. 극장도 안 간다. 집에서 보는 게 세상 편하다.

결국 영화 리스트만 정독하고 음악 채널로 넘어갔다. 음악 채널도 제법 다양하게 있었는데 스칸디나비안 인기 음악과 노르딕 웨이브 채널이 좋았다. 근데 어디를 봐도 곡 리스트가 없어서 뭔지도 모르고 들었다. 매일 리스트가 바뀌는 것도 아닐텐데 플레이 리스트를 제공해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기내 첫 끼니로 치킨파스타와 와인을 마셨다. 보통 빵은 식전빵이긴 하지만 나는 늘 식사 후 디저트 개념으로 먹는다. 버터를 담뿍 발라 먹었는데 맛있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외국에선 외국 음식이다. 와인을 한 잔 더 요청해서 마셨다. 평범한 레드와인이었는데 괜찮았다. 하늘 위에서 먹는 와인은 제법 맛있다.


두 번째 식사는 잡채밥. 우리는 잡채를 반찬으로 생각하지만 외국인들은 잡채를 누들로 생각한다. 누들이 맞긴 하다. 근데 밥 없이 잡채만 먹는다면 조금 이상한 기분이다. 누들과 라이스라니 희한한 조합이다, 그렇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잡채는 반찬인데.


생각보다 잠이 많이 오진 않았다. 설레서 그런 걸까? 음악을 들으며 뒤척이다보니 어느덧 헬싱키에 도착했다. 위에서 내려다본 헬싱키의 구름은 넙적한 조약돌이 낮게 깔린 모양새였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헬싱키

헬싱키에서 바로 코펜하겐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했는데 원래 일정대로라면 공항에서 2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으나 연착 덕분에(?) 곧 출발하는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이번엔 따로따로 앉았는데 좌우에 북유럽 아재들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이륙을 하는데 귀가 찢어질 듯이 아팠다. 늘 첫 비행은 괜찮은데 이어지는 두 번째 비행은 귀가 아프다. 잦은 고도 변경에 반고리관이 신경질을 부리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륙 때 너무 아파서 듣던 음악도 끄고 귀를 부여잡았다. 아프다고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코펜하겐의 날씨는 참 좋았다. 비 예보가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저녁식사는 한식당이었다. 불고기와 미역국이 나왔는데 시차 때문에 졸려서 먹는둥 마는둥 하고 거리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냥 아주아주 평범한 동네였는데 그래도 새로운 풍경이라 즐겁게 찍었다. 공사현장이나 스프레이 낙서를 좋아해서 그런 것들을 찍고 있으려니 패키지 일행 중 한 명인 아저씨가 내게 말했다.


여긴 별 볼 일 없는 시골동네야.


아마 그렇게 열심히 사진을 찍을만한 가치가 없다는 걸 말하려고 했으리라. 아저씨는 정확히 말하자면 '중년 남성'이었다. 우리 아빠보다는 몇 년 젊어보이고, 우리 엄마 또래거나 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죠,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계속 사진을 찍었다.

별 볼 일 없는 시골동네

첫 날 묵을 호텔은 국경을 넘어 스웨덴에 있었다. 덴마크는 졸업 시즌이라 호텔 방을 잡기 어렵다고 했다. 다리를 건너 가는데 두 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구글 맵을 켜고 지도를 봤더니 헬싱보리라는 동네였다. 호텔 옆엔 주유소와 편의점이 있는 것이 전부인, 한적한 동네였다. 체크인만 하고 바로 나와서 편의점 구경을 했다. 웬만한 물건엔 영어도 써 있지 않아 까막눈을 실감했다. 대충 껌 같아 보이는 걸 샀는데 멘토스 같은 츄잉캔디였다. 캐러멜 민트 맛. 달고 끈적한 캐러멜과 상쾌한 민트의 조합이라니 그 맛이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캐러멜을 워낙 좋아해서 사봤다. 캐러멜의 탄 설탕 맛이 은은하게 입안을 감싸고 그 가운데 살짝 치고 들어오는 민트의 시원함이 꽤나 괜찮았다. 꽤나 맛있어서 다음에 또 사먹었다.

덴마크와 스웨덴을 잇는 외레순 다리. 이 다리 이름은 아이폰 사진의 위치정보가 알려줬다. 오른쪽은 호텔 옆 편의점. 앞으로 이런 곳엘 뻔질나게 드나들줄 이 때는 몰랐다.

편의점만 들렀다 바로 호텔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가 참 느렸다. 찬찬히 둘러본 호텔방은 소파 쿠션이 푹 꺼져 있고 가구며 내부 장식이 오래돼 보였지만 깨끗했다.

너무 졸려서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이렇게 첫날 꿀잠을 잔 이후로 시차 따위 전혀 겪지 않고 유럽의 시간에 완벽하게 적응하게 되는데..



드럽게 느리게 굴러가는 <시어머니와 북유럽 여행> 다음 화에 계속.

오래됐지만 깨끗한 헬싱보리의 호텔. 밤 11시를 넘긴 시각에도 대낮처럼 밝았다. 구글맵이 알려준 내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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