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밸런타인 데이라면서요?
어렸을 때부터 운이 없었다.
불행을 몰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지만 딱히 행운이랄 것도 없었다. 사지 멀쩡하고 큰 병 없이 지내왔다는 것만으로 큰 행운이겠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운’이란 큰 선물에 당첨된다거나 뜻하지 않은 기쁨을 얻게 된다거나 하는, 이를테면 ‘요행’에 해당되는 것이다.
봄 소풍의 단골 게임인 보물찾기에서는 단 한 번도 보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친구들이 연필 세트라도 받아갈 때 나만 혼자 꽝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었다. 남들은 잘도 찾는 걸 나는 찾지 못했다. 이른바 똥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뽑기운이 없었다. 심지어 학창 시절엔 5지선다 문제를 푸는 도중 답이 헷갈린다 싶을 때 찍으면 무조건 틀렸다. 그래서 시험을 보다 2번을 할까 3번을 할까, 찍어야겠다, 생각하면 그 문제는 일단 틀린 걸로 간주했다. 도무지 요행을 바랄 수가 없었다.
호주에서 처음 카지노를 갔다. 입장 시 충전한 카드로 돈을 거는 방식이었는데, 구경 겸 머신이나 몇 개 돌리려는 사람들은 보통 20불을 충전하고 1시간 정도를 놀았다. 20불을 충전하고는 눈 깜짝할 새에 모두 잃었다. 오죽하면 같이 간 일행이 ‘너처럼 못하는 애는 처음 봤다’고 할 정도였다. 내가 플레이했던 건 대단히 머리를 굴리는 게임도 아니었고 버튼만 누르는 슬롯머신 류의 게임들이었다.
어느 해의 록 페스티벌에서는 상자에서 종이를 뽑아 경품을 가져가는 이벤트에 참여했다. 남편은 영화 관람권 2매를 뽑았다. 너무 쉽게 뽑아서 참가상으로 영화 관람권은 다 주는 건 줄로만 알았다. 고심해서 뽑았는데 꽝이었다. 이벤트 진행원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 이거 보통은 화장품 샘플이라도 다 걸리는데..
미친 듯한 무운(無運)에 우리 부부는 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깐.
너 뽑기운 진짜 대박이다.
진행원은 꽝을 뽑고도 깔깔대는 우리들의 유쾌한 모습에 감흥(?)을 받았는지 화장품 샘플을 챙겨줬다.
이런 뽑기운 덕택인지 주식에도 비트코인에도 스포츠토토에도 도박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댈 수가 없었다. 내 운을 도무지 신뢰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요행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도 남자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뽑았다.
그렇다. 이건 염장 지르는 글이다. 굳이 오늘이 밸런타인 데이라는 말은 않겠다.
우리 부부는 연애 4년 결혼 10년, 도합 14년을 함께 했지만 여전히 알콩달콩하고 몇 시간만 떨어져 있어도 보고 싶다며 메시지를 보낸다. 종종 친구와 놀러가거나 혼자 친정집에서 며칠 지낼 때면 남편은 언제나 빨리 오라고 성화다.
남자들은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자기만의 시간 충분히 보냈거든?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간다.
같이 있는다고 특별히 다른 걸 하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남편은 같은 소파에 앉아 유튜브를 보고 게임을 한다.
어느 날 물은 적이 있다.
어차피 둘이서 뭘 같이 하는 것도 아닌데, 나 없어도 되지 않아?
아니야. 그래도 있는 거랑 없는 거랑 달라.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도 엄마랑 뭘 특별히 같이 하진 않았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좋았다. 그런 느낌인 걸까? 아내랑 엄마는 다르지만 또 비슷하기도 하고.
아무튼 평생 모아왔던 뽑기운을 남편 뽑는 데 다 써버렸으니, 더 이상의 뽑기운은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내 난자는 정자를 못 뽑는 걸까? 이것 참 곤란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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