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이용품이 필요 없는데요
언제부터인가 인스타그램 피드에도 패션이나 음식 사진 만큼이나 아이 사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인스타는 본디 ‘힙’한 것들의 피난처였다. 광고에 잠식당한 페이스북과 카카오 스토리의 자식 자랑에 진절머리가 난 이들은 인스타에 필터로 한껏 꾸민 사진을 올리며 스스로의 감각을 뽐내곤 했다. 프레임 바깥의 세상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정사각형 틀 안의 세상만 완벽하면 되었다. 온갖 허세가 들끓었지만 그곳은 재밌었다. 나도 은근슬쩍 허세를 부릴 수 있었으니까, 일찍 결혼하고 아이가 없어도 여전히 행복한 커플의 모습을 과시할 수 있었으니까.
내 주변은 대개 결혼이 빠르지 않은 편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꼭 1년 사회생활을 하다 스물여섯에 결혼한 내가 가장 빨랐으니. 여자 동기와 친구들은 서른을 전후해서 결혼을 했다. 덕분에 몇 년 간은 아이 이야기에서 자유로웠다. 하지만 서른둘을 기점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
인스타의 ‘힙’하던 친구들이 엄마가 된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피드에 관심없는 남의 집 애 얼굴이 뜨는 거 싫다’, ‘네 새끼 너한테나 귀엽지’라고 했더랬다. 그러나 그들도 자기 애 앞에서는 영락없는 팔불출이었다. 어느 지인은 인스타에 아이 사진을 몇 장씩 묶어 올리며 고백했다.
…나는 아이가 생겨도 아이 사진으로 피드를 도배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막상 아이를 낳아 길러보니 너무 귀여워 올리지 않고는 도저히 배길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내 새끼’는 평소의 신념마저 꺾을 정도로 귀여운가 보다. 하긴 그건 내 남편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우리 남편을 보면 정말 귀여워서 견딜 수 없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걸 인스타에 올리진 않는다. 나만 보고 싶은 귀여움과 자랑하고 싶은 귀여움의 차이가 아닐까? 내 새끼가 너무 귀엽다면 확실히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어질 것 같긴 하다. 여러분 내가 이렇게 귀여운 생물을 만들어냈어요!
갈수록 인스타 피드에 어린 아이의 사진 비율이 늘어갔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자주 만나지 못하는 이들의 소식을 이렇게나마 들을 수 있었으니까. 문제는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생겼다.
맞춤광고에 아기용품과 어린이 옷이 뜨기 시작했다. 처음엔 기겁해서 스마트폰을 던지고 말았다. 물론 푹신한 이불 위여서 스마트폰이 깨지지는 않았다. 아무리 욱하는 성질이라지만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문명인의 지성은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주섬주섬 스마트폰을 집어들고 다시 생각해봤다. 대체 왜 이런 사태(?)가 생긴 것일까. 최근 아기용품을 검색한 적도 없었다. 아이를 낳은 친구에게 선물을 사준 것도 꽤 오래 전의 일이었다.
범인은 가까이 있었다. 지인의 아이 사진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고 다닌 것이 원인이었다. 인스타는 내가 좋아요를 누른 게시물의 태그와 사진의 종류를 파악한 후 내게 아이과 관련된 키워드의 광고를 송출했다. 저기요, 저는 그냥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해 좋아요를 눌렀을 뿐이지 아이 같은 건 전혀 관심이 없거든요. 구구절절 항변할 곳은 없었다.
대신 광고를 더 이상 보지 않기로 했다. 다행히도 이런 종류의 맞춤광고에는 ‘관심없음’을 표시해 내 관심사를 알려줄 수 있다. 게시물 상단의 버튼을 눌러 ‘광고 숨기기’를 눌렀다. 인스타는 왜 이 광고가 싫은지를 물었다. 딱 마음에 드는 선택지는 없었다. 대충 비슷한 걸 골랐다. 관련성이 없습니다. 그렇다. 아이 용품은 나와 하등의 관련이 없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한 끝에 마침내 아이 용품 광고를 피드에서 몰아냈다.
또다른 복병이 있었다. 네이버 밴드. 지역의 작은 극단에서 활동하고 있기도 하고, 여러가지 수업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어 밴드를 사용하게 됐다. 가입과 관리가 편리한 탓이다. 회사에서 워크숍을 갔을 때 이후로는 써본 적이 없는 밴드였다. 오랜만에 밴드에 접속하는 나는 내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밴드가 띄운 배너 광고 때문이었다.
미시들을 위한 빅사이즈 쇼핑몰
‘미시’라는 건 대체 언제적 유행하던 단어인가? 아직도 이런 단어를 써서 광고하는 업체가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이제 이런 광고의 타깃이 되는 나이가 됐다는 게 조금 슬펐다. 나는 여전히 아이다스 트레이닝복을 아래위로 맞춰 입는 걸 좋아하고 자라 세일기간을 놓치지 않으며 유명 브랜드의 컬래버레이션을 유심히 본다. 이따금 롱스커트를 입지만 여전히 미니 원피스를 더 좋아한다. 구두는 닥터마틴 밖에 신지 않고 평소엔 나이키 운동화를 신는다. 도무지 ‘미시’ 스타일은 아닌 것이다.
또 기가 막힌 것은 ‘빅사이즈’였다. 빅사이즈 옷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검색해본 적이 없는데 단순히 나이 때문에 ‘빅사이즈’를 운운한 것일까? 나는 고등학교 때 입던 옷을 아직도 입는다.
비슷한 광고를 계속 보다보니 화가 치밀었다. ‘나’라는 개인을 대강의 연령대로 뭉뚱그려 ‘이 사람을 이렇겠지’하고 광고를 내보내는 밴드의 안일함에 화가 났다. 당장 내 주변만 해도 빅사이즈 인물은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으며,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이십 대 때 가졌던 자신의 스타일을 완전히 버린 사람도 없다. 오히려 더 트렌드를 좇는 사람도 많다. 내 주변엔 별난 예술가들만 득실대는 것도 아니다. 60% 이상은 평범한 직장인이다.
문제는 인스타와는 달리 밴드엔 광고 숨기기 기능이 없다는 거였다. 덕분에 밴드에 들어갈 때마다 ‘미시’니 ‘빅사이즈’ 운운하는 광고를 마주친다. 너무 자주 봐서 하마터면 클릭할 뻔한 적도 있다. 클릭했으면 밴드 이놈이 옳다구나 하고 빅사이즈 미시 옷을 잔뜩 보여줄 뻔했다. 위험했다.
이제 더 이상 내 인스타와 사파리와 크롬에는 ‘아이’와 관련된 광고가 뜨지 않는다. 그곳을 대신한 것은 빼곡한 옷, 피어싱, 모자, 가방 같은 패션잡화와 칙 뿌리기만 하면 기름때와 곰팡이가 사라지는 마법의 세제 같은 것들이다. 아이용품이 떠서 마음이 산란했던 그 때와는 사뭇 다른, 아주 평화로운 풍경이다. 왜 나는 그렇게 아이용품에 민감했을까? 아마도 아이를 낳아 사는 것이 가장 ‘주류’의 삶이라고 생각해서, 나는 그 ‘주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별 어려움 없이 평범하게 자라 대학교를 졸업하고,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다 결혼하고. 여기까지는 ‘주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나는 남들이 하는 건 다 해봐야 했다. 동아리 활동, 술 진탕 마시기, 때로는 지질하고 절절한 사랑의 추억, 외국 생활, 결혼까지. 하지만 난 결혼 이후 더 이상 인생의 계단을 오를 수 없었다. 오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남들이 저만치 앞서 가는 걸 몇 해나 지켜봤다. 때로는 나와 같은 계단에 머물러 있는 이들과 아직도 저만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이 정도면 괜찮은 삶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정말 힘든데 정말 행복해.
얼마 전 둘째를 낳은 친구는 그렇게 말했다. 또 다른 지인들은 말했다. 아이는 없어도 좋지만, 있으면 더 좋아요. 나는 어쩌면 평생 그 행복을 모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 계단에 서서, 지금 손에 쥔 행복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더 이상의 고양감이 필요 없는 잔잔한 행복.
인생은 곡선 그래프로 이루어져 있어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도 있다. 그리하여 인생 그래프의 평균값은 다들 비슷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면 나의 인생은 지금까지 큰 굴곡이 없었기 때문에 앞으로 일어날 큰 변화는 두렵기만 하다. 어쩌면 내 인생 그래프가 크게 휘청이지 않을까, 앞으로는 내리막 밖에 없는 건 아닐까. 정말 부질없는 걱정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내게는 변명이 필요한 것이다. 이대로 살아가기 위한 변명. 앞일은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래도 내 인터넷 창에 뜰 광고는 선택할 수 있다. 때문에 나는 오늘도 열심히 구글 애드에 열심히 ‘관심없음’을 누르며 내 정보를 구글에 상납하고 있다.
<결혼 10년 차, 아이는 없습니다만>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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