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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그리스 문명의 여명, 야만과 번영의 이중주

문해력 테스트 005

by 리나

전해준 농경과 목축 기술이...테살리아의 불모지라 불리는 척박하고 메마른 평야

[언어이해] 문맥 부조화

[불모지]는 식물이 자라지 못하는 땅을 뜻합니다. 문맥상 농경이 꽃피기 위해서는 [비옥한(fertile)] 땅이어야 하므로, 단어 선택이 문맥과 정반대입니다.


순금과 은(Gold and Silver)이...이 두 금속을 합금하여 만드는 청동을

[상식] 과학적 사실

청동(Bronze)은 구리(Copper)와 주석(Tin)의 합금입니다. 금과 은의 합금이 아닙니다.


머리가 100개 달린 포유류(Mammal) 히드라가

[상식] 생물학적 분류

히드라는 신화 속 괴물이지만, 뱀의 형상을 하고 있으므로 파충류(Reptile)로 묘사됩니다. 포유류라는 분류는 명백한 오류입니다.


카르파티아에서 아프리카 대륙(African Continent)의 우랄산맥에

[상식] 지리학적 사실

우랄산맥은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으로, 아프리카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평화롭고 건설적이었다고...기존의 궁전은 파괴되었고 분묘는 도굴당했다

[언어이해] 정의의 모순

평화의 사전적 정의를 완전히 뒤집어, 문맥상 전혀 맞지 않는 파괴적인 행위를 평화라고 정의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기원전 500년(500 BC)의 아카이아인 침공이

[작업기억] 연도 추적

3문단에서 기원전 2,000년 무렵에 아카이아인이 발칸 반도로 남하하면서부터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뜬금없이 기원전 500년이라고 잘못 언급했습니다. 독자가 앞의 숫자를 기억하고 있는지 테스트합니다.


미노스 왕의 탁월한 리더십은 이후 크노소스의 왕들에게 강한 영감을 주었다

[언어이해] 단어의 정의의 충돌

앞에서는 미노스가 특정인이 아닌 칭호(일반명사)라고 정의했으나, 뒤에서는 특정 개인(미노스 왕)의 리더십이 후대에 영감을 주었다며 고유명사(특정 인물)처럼 서술하여 정의가 충돌합니다.


천연자원이 풍부한 문명일수록 그 문명 속에 살아가는 인간은 혁신하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울 수 없기에 점점 쇄락

[논리적 비약] 성급한 일반화 및 거짓원인

그리스의 단일 사례(자원 부족 -> 성공)를 근거로, 자원이 풍부하면 무조건 망한다는 보편적 법칙을 도출했습니다. 자원이 풍부하면서도 발전한 문명의 사례(미국, 중국 등)를 무시한 전형적인 논리적 비약입니다.




그리스 문명의 여명, 야만과 번영의 이중주


우리가 흔히 그리스 문명이라 부르는 찬란한 고대의 유산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 시작점은 기원전 6,000년경, 소아시아의 이주민들이 전해준 농경과 목축 기술이 그리스 반도에 닿으면서부터였다. 비록 동양보다는 한참 늦은 시기였으나, 이 신석기 혁명은 테살리아의 비옥한 평야 위에서 디미니(Dimini)와 같은 견고한 성곽 도시를 꽃피웠다. 원형 성벽 안에 자리 잡은 궁전과 조직적인 공동체의 모습은 훗날 도래할 미케네 문명의 화려함을 예고하는 서막과도 같았다.


문명의 시계바늘을 조금 더 돌려 기원전 2,600년경으로 가면, 그리스는 청동기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리스 땅이 가진 자원의 결핍이 역설적으로 문명의 개방성을 촉진했다는 사실이다. 구리와 주석이 거의 나지 않던 척박한 환경 탓에, 그들은 생존을 위해 동지중해 너머로 눈을 돌려야 했다. 제련 기술의 도입은 필연적으로 교역의 활성화와 전쟁 무기의 발달을 가져왔고, 아르콜리스만 연안의 레르네(Lerna)와 같은 초기 도시 국가들이 형성되는 기반이 되었다. 신화 속 헤라클레스가 히드라와 사투를 벌였다던 그곳에서, 초기 군주들은 성곽 높은 곳에서 군림하며 권력을 다져갔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인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2,000년 무렵, 인도-유럽어족의 일파가 발칸 반도로 남하하면서부터다. 카르파티아에서 우랄산맥에 이르는 광활한 스텝 지역에서 유래한 이들의 등장은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기존의 궁전은 파괴되었고 분묘는 도굴당했으며, 반도 전역은 수 세기 동안 혼란과 야만의 시대로 회귀했다. 이것은 문명의 교체가 낳은 필연적인 진통이었다.


반면, 대륙의 혼란이 미치지 못했던 바다 건너 크레타섬에서는 전혀 다른 양상의 번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카이아인의 파괴적인 손길이 닿지 않은 이곳에서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평화 속에 인구가 늘고 생산력이 증대되었다. 이러한 풍요는 자연스럽게 강력한 전제군주제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비록 기원전 1,600년대에 산토린 화산 폭발로 추정되는 거대한 자연재해가 섬을 덮쳤으나, 그들은 폐허 위에서 더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을 재건하며 미노스 문명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우리가 흔히 고유명사로 알고 있는 미노스(Minos)는 사실 특정 왕의 이름이 아니라, 크노소스를 통치하는 군주를 지칭하는 칭호였다. 훗날 섬을 정복한 아카이아인들이 이를 왕의 이름으로 오해하여 전설을 만들어낸 것이다. 크노소스의 군주는 단순한 정치적 지배자를 넘어 신과 소통하는 제사장이자, 모든 경제 활동을 통제하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미노스의 궁전은 거대한 신전이자, 장인들이 사치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었고, 곡식을 저장하는 물류 센터였다.


크레타의 통치 방식은 이집트의 파라오나 메소포타미아의 왕권과 비견될 만한 신권 정치였다. 왕의 관료들은 문자를 독점한 서기관들을 앞세워 생산과 무역, 노동력을 치밀하게 통제했다. 비록 기원전 15세기 중엽, 대륙에서 건너온 아카이아인의 침공과 지진으로 그 화려한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그들이 보여준 고도의 관료제와 중앙집권적 시스템은 소아시아와 오리엔트의 소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고대 지중해 세계의 한 축을 담당했다.


결국 고대 그리스의 역사는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려는 개방적인 노력, 대륙에서 밀려온 야만적인 정복, 그리고 섬 지역의 독자적인 번영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만들어낸 거대한 드라마였다. 리히토펜이 명명한 비단길이 동서양을 잇는 통로였다면, 에게해는 문명과 야만, 인간과 신, 결핍과 풍요가 교차하는 역설의 바다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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