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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마야 문명에 대한 한 스페인 사제의 이중적 시선
16세기 중반, 스페인의 마야 정복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종교적 열정은 광적인 파괴로 이어졌습니다. 1535년, 최초로 이 땅에 발을 디딘 프란체스코회 사제들은 마야 원주민들을 진정한 신앙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그들의 문화적 요소를 '악마의 방해물'로 규정했습니다. 그들의 우상은 파괴되었고, 신전은 불탔으며, 원시 제전이나 희생 의식을 치르는 행위는 극형에 처해졌습니다. 심지어 원주민의 향연, 노래와 춤, 그리고 그들의 지적·예술적 성취—예컨대 그림, 조각, 천체 관측, 상형문자 기록 등—까지도 엄격하게 금지되었으며, 이를 행하거나 만들어 낸 이들은 가차 없이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파괴적 분위기 속에서도 마야 문명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유카탄 지역의 초대 주교였던 디에고 데 란다(Diego de Landa)입니다. 성직자이자 마야인의 생활을 엄격하게 규제했던 재판관이었던 란다는, 그 자신이 금지했던 문명의 가장 풍부한 기록을 후대에 남긴 모순적인 인물입니다. 란다는 그의 저서 《유카탄 지역 문물들의 제관계》에서 16세기 마야 문물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놀랍게도 란다는 마야 문명 전반에 대해 완전히 부정적인 시각만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마야 문명과 더불어 용기, 절제, 의지, 서로 화합하는 기독교적 미덕을 보여 준 주민들에게 자주 찬사를 보냈습니다. 란다는 마야인들이 결코 야만인이 아니며, 오히려 농경지를 부지런히 가꾸고, 나무를 심고, 아름다운 초가집과 눈부시게 빛나는 도시를 건설한 선진 문명의 창조자임을 확인했습니다. 마야의 도시 구조는 계층적이었음을 엿볼 수 있는데, 도시에는 신전과 대광장이 중심에 있었고, 그 주위에는 수장과 신관의 거처가, 다음으로 하위 관리의 집이 차례를 차지했으며, 평민의 집은 도시 외곽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란다는 황폐화된 마야 도시의 유적을 직접 둘러보고 그 엄청난 규모에 넋을 빼앗겼습니다. 그는 이사말, 티우(메리다 건설지), 욱스말, 치첸이트사 등 여러 유적지를 방문하고 스케치까지 남겼습니다. 특히 치첸이트사에서는 인간을 제물로 바쳤다는 웅덩이(세노테, cenote)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폐허의 웅장한 아름다움에 놀란 란다는 "지금도 이 나라는 너무도 아름답다. 그러나 저 위대한 건축물이 세워졌던 시대보다는 못하리라"라고 회상했습니다. 란다는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을 보며 "지배자가 백성을 혹사하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건축 자체가 신을 숭배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던가? 어쩌면 마야인은 도시의 위치를 자주 바꾸었던 것은 아닐까?"와 같은 가설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란다는 마야판에서 비문이 새겨진 돌기둥들을 보았는데, 이 도시는 마야인이 떠난 후 120년 동안 텅 비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가 원주민에게 돌기둥에 대해 묻자, "우리 선조에게는 20년마다 돌기둥을 하나씩 세우는 관습이 있었다. 20이라는 숫자는 주기(뼈)를 계산하는 데 쓰였던 기본 숫자다"라는 답을 들었습니다. 이는 마야의 달력 계산과 건축 관습을 시사합니다. 한편 이사말의 가장 빼어난 12개 건축물을 누가 세웠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란다는 상식에 근거해 마야인만이 그러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란다가 기록을 남긴 유카탄 북부는 마야 문명의 영향이 확대된 지역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습니다. 전성기부터 8세기 말엽까지 마야 문명은 현재 멕시코의 치아파스주, 과테말라의 페텐 지방, 온두라스 서부 일부, 엘살바도르의 북부 지방을 포함하는 유카탄 반도 전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9세기 고전기 문명이 몰락한 후, 마야의 많은 주민들은 열대림 지역으로 흩어져 산발적으로 모여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수 세기 동안 마야의 도시는 밀림에 묻혀 잊혔으며, 유적의 본격적인 발굴은 18세기 말에 시작되어 20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끝났습니다.
밀림을 통과하는 것 자체가 위험했고, 치아파스, 벨리즈, 페텐 지역의 저지대는 정복자나 식민지 개척자들에게 광물 자원이나 쓸 만한 노동력이 없다는 이유로 매력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척박한 '밀림의 푸른 지옥'으로 들어간 이들은 가련한 영혼을 구원하겠다는 신념을 지닌 선교사들뿐이었습니다. 1525년에는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가 타바스코에서 온두라스에 이르는 마야 남쪽 지방을 횡단하는 대장정을 감행했습니다. 140명의 스페인 병사, 3,000명의 인디오 전사와 짐꾼, 150마리의 말과 가축을 동반한 이 여정은 6개월 가까이 걸렸습니다. 코르테스 일행은 늪지, 길을 잃기 쉬운 밀림, 낭떠러지 등의 난관에 봉착했고, 식량과 길을 찾기 위해 원주민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마을들은 대부분 백인이 무서워 도망친 원주민들에 의해 파괴되거나 불살라진 뒤였으며, 코르테스는 이로 인해 절망감을 맛보고 원주민의 마음을 되돌리려 노력했습니다.
이 글에서 언급된 지역이 표시된 지도
당시 한반도에서 벌어진 일들과 비교한 타임라인
지명 및 유적
치첸이트사 (Chichen Itza)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위치한 마야 문명 최대의 유적지 중 하나로,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이트사족의 우물 입구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마야의 천문학 기술이 집약된 엘 카스티요(쿠쿨칸의 피라미드), 전사의 신전, 구기장 등이 유명합니다. 춘분과 추분에 피라미드 그림자가 뱀처럼 기어 내려오는 현상이 나타나도록 설계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세노테 (Cenote)
유카탄 반도의 석회암 지반이 침식되어 무너져 내리며 드러난 천연 지하 우물(싱크홀)입니다. 강이나 호수가 부족한 유카탄 지역에서 마야인들에게 중요한 식수원이었으며, 동시에 비의 신에게 제물(때로는 인신공양)을 바치는 신성한 종교적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현재는 신비로운 경관 덕분에 인기 있는 다이빙 및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에르난 코르테스 (Hernán Cortés, 1485~1547)
스페인의 정복자(콩키스타도르)로, 소수의 병력으로 멕시코의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것으로 가장 유명합니다. 본문에서는 그가 반란 진압과 탐험을 위해 유카탄 반도 남쪽의 험난한 밀림을 뚫고 온두라스까지 원정을 감행한 사실이 언급되었습니다. 그의 정복 활동은 중남미 지역의 스페인 식민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유카탄 반도 (Yucatan Peninsula)
멕시코 남동부, 과테말라, 벨리즈에 걸쳐 있는 반도로 마야 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지질학적으로 거대한 석회암 대지로 이루어져 있어 지표수가 부족하고 세노테가 발달했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스페인 정복자들이 초기에는 자원이 부족하고 척박하다는 이유로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인물 및 세력
디에고 데 란다 (Diego de Landa, 1524~1579)
스페인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로 유카탄의 주교를 역임했습니다. 가톨릭 전파를 위해 마야의 수많은 고문서와 우상을 불태우는 오토다페(신앙의 행렬)를 주도하여 마야의 지적 유산을 말살한 장본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쓴 《유카탄 문물에 관한 보고서(Relación de las cosas de Yucatán)》는 당시 마야인의 생활상, 언어, 달력 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훗날 마야 문명 연구와 문자 해독에 결정적인 열쇠가 되었습니다.
기타 용어
마야 문명 (Maya Civilization)
기원전 2000년경부터 17세기까지 현재의 멕시코 동남부, 과테말라, 벨리즈,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등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 번영했던 문명입니다. 0의 개념을 포함한 고도로 발달한 수학, 정밀한 천문학, 독자적인 상형문자 체계를 갖추었으며, 거대한 석조 건축물과 정교한 달력으로 유명합니다. 9세기를 전후로 급격히 쇠퇴하여 밀림 속으로 사라졌으나, 그 원인은 환경 파괴, 전쟁, 가뭄 등 복합적인 것으로 추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