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족하는 삶
출근길에 양쪽으로 나무가 우거진 거리가 하나 있다. 그 길을 몇 년째 지나면서 매 계절마다 계절의 변화를 만끽하곤 한다. 봄이면 꽃나무, 여름이면 초록 잎이 무성한 나무들, 가을이면 단풍, 겨울이면 앙상한 나뭇가지. 무심코 지나치던 풍경을 어느 날은 눈과 마음에 가득 담아본다. 계절과 자연의 언제나처럼 부지런하다. 때론 시간은 무척 금방 흐르지만 내 삶의 성장이 더디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자연의 모습이 계절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듯, 내 삶 가운데서도 나도 모르는 새에 성실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다시 한번 묵상해 보게 되었다.
요즘 종종 밀려오는 공허함과 막막함 속에서 감사하게도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해 보게 된다. 사람들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고 (물론 나를 포함하여) 당장 눈앞이 가로막힐 수도 있고, 캄캄한 터널을 꽤 오래 지나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진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것을 요즘 너무 많이 느끼는 중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나의 모든 계절을 함께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마치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는 초능력이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착각 속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는 것 같다.
본격적으로 출산휴가와 페이를 알아보고 하면서 먹고살 길이 막막해 보인 것은 사실이었다. 걱정이 많은 나와 반대로 남편은 꽤 낙관적인 사람이고 '하나님 안에서 자족하는 삶'을 자주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본인의 삶을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이끌어주신 것에 대한 신뢰가 무척 단단한 것으로 느껴진다. 나 역시도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한걸음 한걸음 알맞게 인도해 주신 것을 믿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에 대해 자족하기보다는 하나님 조금만 더 넘치게 주시면 안 될까요..ㅎㅎ 하며 생각했던 것 같다.
다가오는 월급부터는 100% 모두 가계를 합치기로 남편과 이야기를 했다. 집과 차량에 들어가는 고정 비용을 제외하고 저금은 얼마나 할지, 공통 식비는 얼마나 쓸지, 개인 용돈은 얼마씩 받을지 그런 고민을 했다. 계속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었으나 그동안은 집에 필요한 것들 소소하게 구입하고, 여행 가고 하느라 돈을 쓰기 바빴다. 지금 우리 집은 원베드라서 아기방은 어림도 없는 상황이다. 내심 초조한 마음에 빨리 당장 집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산다면 대략 40~45k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디포짓을 영끌모해서 넣는다고 해도 매달 나가는 모기지가 최소 2000 이상으로 예상되었다. 매달 고정적으로 나가는 렌트비는 현재 1350인데 모기지만 최소 2000 이상 나가게 된다면.. 출산휴가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집이 없는 상황에서 아기천사가 찾아왔을 때, 당연히 감사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우리에게 찾아온 아기천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막상 조목조목 생각해 보니, 우리 상황에서 지금 고정적인 모기지를 내고 있었더라면 오히려 더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우리가 소유한 집과 모기지가 없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러키비키 이거 마자..?ㅎㅎ 일적인 면에 있어서도 지금 하고 있는 곳에서 어떻게 더 잘해볼지, 장기적으로 어떻게 하면 더 자유롭게 일할 수 있을지 많이 고민해 보고 있다. 생각을 바꾸고 보니 지금 내 삶의 모든 것이 다 아름다워 보이고 무척이나 감사하게 되었다.
하나님 안에서 자족한다는 것의 의미가 아쉽게도 풍요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나님 입장에서 물질을 바라보면 각 사람마다 적정하고도 알맞게 허락하시지 않을까. 하나님을 믿지 않더라도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일반 은총이 있고, 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 은사로서 하나님이 또 넘치게 주시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 삶의 상황과 형편을 나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바라보는 것, 나의 삶에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믿고 감사하는 것이 결국에 하나님 안에서 자족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