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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oom Jul 22. 2021

왜 코끼리는 되고 귀신은 안되지

날 것의 감정, 학습된 감정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흥미롭다.

누군가를 이렇게 몰두해서 관찰한 것도 처음이지만, 백지상태의 공간을 채워나가길 갈망하는 누군가를 이렇게 가까이서 만난 것도 처음. 언어와 생활습관 같은 영역은 학습을 통해 빈 공간을 채워나간다는 것은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정의 영역은 신세계.


 다양한 감정이 있지만 먼저 흥미롭다고 느낀 영역은 공포. 언어로 표현을 하지 못하고 울음으로 감정을 표현하던 시기에는 막연히 '엄마가 곁에 없으면 슬프구나, 깜깜하면 무섭구나.' 같이 아이의 감정을 상상했다.


 그리고 서서히 말문이 터지고 언어로 표현을 하게 되자 두려움의 대상을 알게 되었다.

시작은 이랬다, "엄마, 코끼리 이쪄 으잉 응애"

출처 : 핀터레스트


 '코끼리????? 갑자기 화장실에?'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해졌다.

안방에 붙어 있는 화장실은 보통 불이 꺼져있었고 다른 방과 달리 유리문으로 마감되어 문을 닫아도 밖에서 안이 어둡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상태였고 그런 이유로 아이의 두려움을 자아내는 미지의 공간은 어두운 안방 화장실이 되었다.


출처 : 핀터레스트


 코끼리는 호랑이가 되었다.  "엄마, 흐잉 호랑이가 있는 것 같아."

그렇게 어느 날은 원숭이가, 어느 날은 악어가 다양한 동물들이 안방 화장실로 숨어들며 몇 달이 흘렀다.

이미 안방 화장실은 아프리카의 사바나 초원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커다란 호랑이가 저 좁은 공간에 들어갈 수 있을 리도 없고 도무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비밀번호를 열고 화장실에 숨어들어 있을 확률이 희박해 귀여움에 웃으며 달래 줬다.


  더욱 강력해진 새로운 대상이 등장한다.

출처 : 핀터레스트

 

문제의 초록 괴물, 'Go Away Big Green Monster!'은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며 상상 속의 초록 괴물을 없애 버리는 책이라 두려운 감정을 다스리는 것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읽어주었다. 하지만 결과는 대 실패. 오히려 머릿속에 명확하지 않은 두려움의 대상을 선명한 이미지로 만들어주는 부작용이 생겼다.


  두려움의 대상이 본인이 아는 가장 무서운 존재인 커다란 동물에서 초록 괴물이 되더니, 이젠 소리가 나거나 두려운 감정이 생기면 "엄마 귀신이 있는 것 같아."라고 한다.


 아이는 엄마의 평범한 일상에 늘 커다란 물음표를 던져주어 그냥 넘기던 작은 감정들마저 돌이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화장실에 '사자, 코끼리 그리고 악어'와 같은 거대한 동물들이 하루 걸러 출몰해 집이 사바나 초원이 되어갈 때 한 번도 두렵다는 감정이 전염되지 않았다. 하지만 '귀신'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그동안 스크린을 통해 접했던 잔상이 스쳐 지나가며 함께 오싹해졌다.


 '왜 코끼리는 되고 귀신은 안되지? 그럼 코끼리 귀신은 되는 건가?'

감정들 특히 '두려움'과 같은 감정은 생존을 위한 원초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막연한 어둠 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와 공격할 것이다는 감정이 날 것이라면, 코끼리에서 귀신으로 변화된 이미지를 두려워하는 건 학습된 것이 아닐까 한다. 내 경우는 더 이상 어둠 속 코끼리의 존재를 믿지 않아 두렵지 않지만 '귀신이 보인다'는 아이의 말엔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스스로 감정의 영역은 그저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며 너무 노력하지 않고 방치했다는 생각이 들어 한 번 더 오싹했다.


 두려움, 슬픔, 기쁨과 같은 감정들이 습에 영역에 한 발쯤 딛고 있다고 생각하니 양육자로써의 무게가 더욱 무거워진다. 요즘 아이가 자아가 더욱 강해지면서 가끔 서러움이 폭발할 때가 있는데 진정한 후 "기분이 어땠어?"라고 물어보면 "미운 기분이었어 또는 안 예쁜 기분이었어."라고 한 뒤 "속상했다, 부끄러웠다."와 같은 말들을 덧붙인다.


 이번 주의 어느 날은 아끼는 공룡 피규어들을 복도에 일열 횡대로 세워놓고 신나게 놀다가 화장실을 다녀오더니 난데없이 펑펑 울었다. 나중에 이유를 들어보니 볼일을 보고 팬티를 안 입고 나왔는데 공룡들이 놀려서 너무 부끄러웠다고 한다. 슬픈 사연임에도 '세상에 너 이제 부끄러움도 아는 인간이 되어가는 거니!'의 탄복과 '귀여워 너무너무 귀여워'라는 마음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아이를 안고 "공룡들이 놀리는 거 아니야, 너무 대견한걸. 이제 변기에 스스로 볼일도 보고 형아 같아 너무 멋져." 라며 토닥여주었다.


 이제 감정을 느끼고 분출하고 또 해소하며 한 뼘 더 자라난다. 앞으로 뜨겁고 가슴 시린 첫사랑과 첫 이별을 겪게 될 거고 새로운 감정들을 또 느끼고 배워 나가겠지. 기대된다. 오늘도 고마워.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고 또, 감정으로 부터 자유로운 우리가 되기를. 사랑은 언제나 더 많이.





"엄마, 내가 걱정하지 마 내가 엄마를 지켜줄게."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꽉 찬다.

물론 매미를 잡아달라고 하고 막상 매미가 나타나면 엄마만 덩그러니 남겨두고 재빠르게 도망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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